언어유형론이 의미를 바라보는 방식
(1)수분이 없는 상태, (2)살이 없음, (3)종이같음(?), (4)길이가 길고 둘레가 작음
(1)~(4)의 의미를 한 단어짜리 형용사(또는 동사)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제가 생각한 답은 이렇습니다.
(1)과 (2): '마르다~말랐다' / (3)과 (4): '얇다~가늘다'
('얇다'와 '가늘다'의 의미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이렇게 (1) 의미와 (2) 의미를 묶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3) 의미와 (4) 의미에 대해서는 각각 별도의 단어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1)에 대해서 '건조하다' 등 또 별도의 표현이 가능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르다'의 의미 범위가 (1)에서 (2)에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한국어 단어 말고 한 단어짜리 영어 형용사로 (1)~(4)를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1)은 dry, (2), (3), (4)는 thi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hin 외에도 (2) skinny, slender 같은 말이 떠오르지만, 제 영어 실력으로 (3)과 (4)에 대해서는 thin 말고 다른 말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어쨌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thin'의 의미 범위가 (2)~(4)까지 모두 미친다는 것입니다.
한국어에서는 (1)과 (2)를 합쳐서 한 단어로 표현하고 (3)과 (4)는 별도의 단어로 표현하는 반면,
영어에서는 (1) 의미만 따로 떼어서 'dry'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2), (3), (4) 의미를 묶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그림에 한꺼번에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 언어의 다의어 관계(polysemy)를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 지도(semantic map)라고 합니다.
각 단어가 그림에서 얼마만큼의 의미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나타낸 것이므로 지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하늘색은 한국어 단어들의 의미 지도를, 주황색은 영어 단어들의 의미 지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나타내고 그 의미들끼리 서로 관련성이 있을 때, 그 단어를 '다의어'라고 부릅니다.
의미 지도는 여러 언어의 다의 관계를 연구할 때 유용한 방법입니다.
맨 처음에 제시했던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것은 [(1)수분이 없음, (2)살이 없음, (3)종이같이 얇음, (4)길고 둘레가 작음]이라는 네 가지 개념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반영한 개념 공간(conceptual space)입니다.
개념 공간 위에 각 단어의 의미 범위를 그리면 그것이 의미 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공간의 구획을 나누어 지도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개념 공간을 그릴 때 서로 맞붙어 있는 개념(의미)은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언어에서 하나의 단어로 묶여서 표현되는 개념들이어야 합니다.
제가 그린 개념 공간도 랜덤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준에 맞추어 그린 것입니다.
[(1)수분이 없음]과 [(2)살이 없음]은 한국어에서 '마르다'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여 표현됩니다. 따라서 (1)과 (2)는 개념 공간에서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2)살이 없음]과 [(3)종이같이 얇음]은 영어에서 'thi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여 표현됩니다. 따라서 (2)과 (3)는 개념 공간에서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3)종이 같이 얇음]과 [(4)길고 둘레가 작음]은 영어에서 'thi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여 표현되고, 최근 한국어에서는 '얇다'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3)과 (4)는 개념 공간에서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이건 제가 실수한 부분인데, [(2)살이 없음]과 [(4)길고 둘레가 작음]도 영어에서 'thi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여 표현되므로 사실은 (2)와 (4)도 맞닿도록 그리는 게 맞았을 것입니다. (3)과 (4)의 위치를 위아래로 놓고 그 둘을 같이 (2)의 바로 오른쪽에 두었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잘 관찰해 보면, 개념공간 및 의미지도상에서 서로 맞붙어 있는 의미들은 서로 연상 가능한 관계에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맞붙어 있지 않은 의미들은 서로 연상 가능한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논리적 함의는 아니고 화용적 함축~추론입니다.)
만약 [(1)수분이 없음]과 [(4)길고 둘레가 작음]을 서로 묶어 한 단어로 표현하는 언어가 있었다면 (1)과 (4) 또한 서로 맞닿게 그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가 (제가 아는 한) 없기에 (1)과 (4)는 개념 공간과 의미 지도에서 서로 맞닿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두 의미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연상 관계가 잘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언뜻 생각하기에도 수분이 없는 것과 가느다란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의미 지도와 개념 공간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학술 자료로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박진호(2015), 언어유형론이 한국어 문법 연구에 계시하는 것들 ([4. 의미 지도] 부분을 읽으시면 됩니다.)
박진호(2012), 의미지도를 이용한 한국어 어휘요소와 문법요소의 의미 기술 (위보다 내용이 많고 자세합니다.)
의미 지도는 언어유형론에서 의미를 연구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어휘 의미(실질적 의미)에 대해 연구할 수도 있지만 문법 의미(형식적 의미)에 대해서도 의미지도를 이용한 연구가 가능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바람직합니다.
개념 공간 및 의미 지도가 실제로 사람 머릿속을 그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언어학자가 연구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Croft 등 사용 기반(usage-based) 관점을 취하는 연구자는 전자를, Haspelmath 등 정신적 실체 연구에 회의적인 연구자는 후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개념 공간을 스스로 그려 보는 것은 아주 힘겹고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영어와 한국어의 몇 개 단어만 가지고 끄적끄적 만든 허접한 개념 공간은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벌써 오류가 하나 발견되었죠.
그러니까 남이 더 잘 만들어 놓은 것을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CLICS(https://clics.clld.org/)라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상단 맨 오른쪽의 'concepts'를 누르고,
개념 공간의 중심점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를 'name'열에 넣어 검색한 뒤, (이 경우는 dry로 하겠습니다.)
표 맨 오른쪽의 'subgraph DRY'를 누르면...
이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개념 공간이 등장합니다.
'dry'의 개념 공간 (CLICS 원본) ('cold'로 이어지는 상단부 제외)
심지어 CLICS에서 제공하는 개념 공간은 개념들끼리의 관계성이 강한지 약한지까지 보여줍니다.
한 단어로 표현되는 사례가 많을수록 진한 선으로, 적을수록 얕고 얇은 선으로 보여줍니다.
'좁다'와 '가느다랗다'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언어가 아주 많은가 봅니다.
다만 CLICS의 한국어 데이터베이스는 영 별로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니 '마른'에 대해서는 'dry'만 연결되어 있고 'thin(slim)'에 대해서는 '마른'은 없이 '호리호리한'만 실려 있는 것 같습니다.
WALS도 그렇지만 인터넷상의 언어유형론 데이터베이스가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유용하고 재미있으니 잘 활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개념 공간과 의미 지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설명에 대한 질문이나 제가 범한 오류에 대한 지적과 정정은 아주 편하게 직설적으로 남겨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