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오 김 Mar 21. 2023

능격-절대격 언어? 왜 이런 문법이 쓰이는 걸까?

언어유형론의 아름다움에 입문해 보자

언어학, 언어유형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능격-절대격'이라는 해괴한 문법 시스템을 가진 언어를 마주하게 된다. 능격-절대격의 개념은 워낙 낯설다 보니 한두 번 봐서는 바로 내재화하기가 쉽지 않다.


주격이나 목적격은 아는데, 능격은 뭐고 절대격은 무엇인가?

이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주격'과 '목적격(대격)'을 해체해 보아야 한다.


a.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b. 호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위 문장에서 '엄마가'와 '호랑이가'는 주격(&주어)이고, '쥐를'은 목적격(&목적어)이다. 새삼스러울 만큼 당연한 소리다.


그런데 위의 '엄마가'와 '호랑이가'가 둘 다 주격이라 해서 정말 서로 똑같은가?


이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보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위 문장의 '엄마가'와 '호랑이가'에는 아래와 같이 적어도 두 가지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적 차이: '엄마가'는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죽다)의 주어이고, '호랑이가'는 목적어가 있는 타동사(잡아먹다)의 주어이다.


2. 의미적 차이: '호랑이(가)'는 의지와 통제력을 가지고 '잡아먹는'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agent)인 반면, '엄마(가)'는 '죽는'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지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단지 어떤 변화를 '당하는' 피동자(patient, 피동작주)'일 뿐이다. 이러한 '엄마가'의 의미적 특징은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쥐를'의 의미적 특징과 더 비슷하다.[1]


물론 자동사의 주어가 항상 의미적으로 '당하는 자'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동사의 주어가 '당하는 자'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반면에 목적어를 갖는 타동사의 주어가 '당하는 자'인 경우는 훨씬 찾아보기 힘들다.[1]


한국어의 문법에서는 1이나 2와 같은 사실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2] 자동사의 주어이든 타동사의 주어이든 주어는 똑같이 주어이고, 행위하는 주어이든 당하는 주어이든 주어는 똑같이 주어이며, 당하는 주어라고 해도 그것은 목적어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는 영어 등 우리가 주로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부분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어나 영어처럼 자동사의 주어와 타동사의 주어를 똑같이 '주어'로 간주하고, '목적어'를 그와 독립된 별도의 개념으로서 다루는 언어를 '주격-대격 언어'라고 한다.


반면에 능격-절대격 언어들은, 위의 12에서 말한 문법적/의미적 사실 및 다음에 이야기할 다른 이유에 기반하여,

- 위의 '호랑이가'와 같은 '타동사의 주어'를 '엄마가'와 같은 '자동사의 주어[3]'로부터 분리하여 별개의 독립된 개념으로 두고, (아마 애초에 둘을 서로 연결짓지도 않을 것이다)

* '엄마가'와 같은 자동사의 주어'쥐를'과 같은 목적어와 함께 묶어 하나의 개념으로 간주한다.

- 전자, 즉 '타동사의 주어'를 분리시켜 하나의 개념으로 만든 것을 '능격'이라 부르고,

* 후자, 즉 자동사의 주어와 '목적어'를 하나로 묶은 것을 '절대격'이라 부른다.[4]



(한국어 위키백과 '정렬(언어학)' 문서의 자료를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능격-절대격 언어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낯설어 보이지만, 능격-절대격 언어는 생각보다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세계 언어의 무려 17%가 능격-절대격 언어라고 한다.[5]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능격-절대격 언어들이 '엄마가 죽었다'의 '엄마가'처럼 '당하는' 의미를 가진 자동사 주어만 절대격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능격-절대격 언어들은 '가다' '뛰다' 등의 주어, 즉 행위하는 자동사 주어도 절대격으로 다룬다.


주격-대격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죽다'의 주어와 '잡아먹다'의 주어를 딱히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능격-절대격 언어의 화자들은 '죽다'의 주어와 '가다'의 주어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모두 '목적어'와 같이 다루는 것이다.[6]




만약 한국어와 거의 똑같은 어떤 가상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가 능격-절대격 언어라면 어떻게 될까?


이 언어에서는 '-이/가'가 주격 조사가 아니라 능격 조사이고, '-을/를'이 목적격 조사가 아니라 절대격 조사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 언어로는 위에 제시한 문장이 아래와 같이 변할 것이다.


a'. 오늘 엄마를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b'. 호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a'.가 존속살인을 말하는 문장이 아님에 유의하라. '죽였다'가 아니라 '죽었다'이다.

의미는 한국어의 '엄마가 죽었다'와 동일하다. 이 문장의 동사는 자동사 '죽다'이고, 그 주어는 '엄마'인데, 그 격이 절대격 '-를'로 표현된 것이다.


한국어의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를 의미하는 문장은 이 가상의 능격-절대격 언어에서 '지나가던 개를 웃겠다'가 될 것이고,

한국어의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이 언어에서 '슈퍼맨을 돌아왔다'가 될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만들어낸 가짜 언어 말고, 실제로 능격과 절대격을 사용하는 자연 언어들의 예문을 살펴보자.



1. 바스크어(Basque) (출처: 영어 위키백과 Ergative-absolutive alignment)


문장: Martin etorri da.

단어: Martin-Ø                                  etorri da.

주석: Martin-절대격 (자동사의 주어)     도착했다 (자동사)

의미: 'Martin이 도착했다.'


문장: Martinek   Diego ikusi du.

단어: Martin-ek                              Diego-Ø                      ikusi du

주석: Martin-능격 (타동사의 주어)     Diego-절대격 (목적어)   보았다 (타동사)

의미: 'Martin이 Diego를 보았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보다'의 주어 Martin과 '도착하다'의 주어 Martin이 서로 같은 '주어'일 것 같지만,

바스크어에서 '보다'의 주어 Martinek에는 능격 표지 -ek를 붙이는 반면

'도착하다'의 주어 Martin에는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다. '보다'의 목적어 Diego에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주격-대격 언어에서 주어에 아무런 표지가 붙지 않는 일이 많듯, 능격-절대격 언어에서는 절대격에 아무런 표지가 붙지 않는 일이 많다.)



2. Avar어 출처: Whaley(1997:157)

문장: Was wekérula.

단어: W-as-Ø                                        w-ekér-ula.

주석: 남성-아이-절대격 (자동사의 주어)     남성-뛰-ㄴ다 (자동사)

의미: '남자아이가 뛴다.'


문장: Inssucca jas jéccula.

단어: Inssu-cca                              j-as-Ø                              j-écc-ula

주석: 아버지-능격 (타동사의 주어)     여성-아이-절대격 (목적어)    여성-칭찬하-ㄴ다 (타동사)

의미: '아버지가 여자아이를 칭찬한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독어, 러시아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주격-대격 언어에서 동사의 (성)/수/인칭을 일치시키는 주체가 보통 주어인 반면,

Avar어의 타동사문에서 동사의 성을 일치시키는 주체는 능격어(아버지)가 아니라 절대격어(여자아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이상 능격-절대격이라는 문법 체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그만큼 낯설어 보이는 이 체계가 이토록 발달하여 잘 쓰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정보구조'의 측면에서 능격-절대격 체계의 기능적 효용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하겠다.

관심이 있는 독자는 Hopper and Traugott (2003)의 문법화 교재 169쪽부터의 내용 및 거기에서 인용하는 Du Bois의 1987년 연구를 참고하면 좋겠다.




[1] 이러한 설명은 Whaley(1997: 160-161)를 참고한 것이다. 다만 맥락과 취지는 좀 다르다.


[2] 언어학자들이 저술한 한국어 문법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맞지만), '-이/가', '-을/를', 어순 등 문법 관계를 표시하는 수단들이 자동사의 주어와 타동사의 주어에 대해 똑같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3] '주어'는 한국어나 영어 같은 주격-대격 언어 안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므로, 엄밀히는 '자동사의 주어'이니 '타동사의 주어'라는 말을 능격 언어 문법에 대해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소한 자동사의 논항에 대해서는 주어라느니 목적어라고 말하지 말고 '자동사의 유일논항'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편의상 이 글에서는 '자동사의 주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4] '주어'나 '목적어'는 '문법관계(grammatical relation)' 또는 '문장성분'의 이름이고 '격'이 아니다. 따라서 '주어'와 '목적어'를 분리하거나 하나로 묶은 무언가에 대해서 '능격'이나 '절대격'처럼 격의 이름을 써서 말하기보다 '능격어'나 '절대격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엄밀하겠으나, 맥락상 독자에게 관련 개념이 충분히 익숙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문법관계와 격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서술하였다. 보통 (적어도 언어유형론의 맥락에서는) '격'이라는 말은 주로 '문법관계'를 나타내는 형태적 표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5] Velupillai(2012)의 언어유형론 개론 교재 243쪽에 실린 WALS 통계. 다만 크리올 언어들은 빠진 수치이다.

참고로 Velupillai의 언어유형론 개론 교재에는 챕터마다 수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므로, 관심있게 읽어 보기 좋은 책이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온 교재인 만큼 다른 부분에서도 좋은 내용이 많다.


[6] 행위하는 자동사 주어와 당하는 자동사 주어를 구분하여 행위하는 자동사 주어는 주격으로, 당하는 자동사 주어는 절대격으로 다루는 언어도 있다. 이를 활격-불활격(active-inactive) 언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 '정렬(언어학)' 문서 또는 언어유형론 개론 교재를 참조하라.


+ Whaley(1997)의 Introduction to Typology: The Unity and Diversity of Language 는 언어유형론 입문서로 아주 좋은 책이다. 외대 대학원에서 청강했던 언어유형론 수업에서도 이 책을 교재로 하였다.


궁금한 점에 대한 질문, 오류에 대한 지적, 단순 코멘트 등 어떤 것이든 댓글은 항상 환영합니다.




*** '능격 동사(ergative verb)'라는 개념이 궁금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해당 개념은 본문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연재훈 교수님의 2008년 논문 <한국어에 능격성이 존재하는가 : 능격의 개념과 그 오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