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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오 김 Jul 09. 2023

3 - '줄은'? 코퍼스로 보는 동음이의어 회피

언어사용자는 때로 기꺼이 수고를 감내한다

1. 줄은? 준?

<폭탄> 35쪽

최근에 교보문고에서 광고하던 일본의 미스테리 소설 <폭탄>을 사서 읽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괜찮다.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은 건 좋은 것 아닌가.


'줄은'에 주목해 보자.


표준어 기준 ‘줄다’의 관형사형은 현재시제에서 ‘주는’, 과거시제에서 ‘준’이다.

규범에 따르면 어간 말음이 /ㄹ/인 용언들은 /ㄴ/, /ㅂ/, /ㅅ/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예외 없이 /ㄹ/이 탈락하는 활용을 하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 트위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twitter.com/urimal365/status/222599850062127104


그러나 나를 포함한 상당수 한국어 모어 화자들은 맥락 없이 ‘주는’과 ‘준’을 보면 ‘줄다’가 아니라 ‘주다’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꽤나 ‘줄다’와 연관지을 만한 맥락에서 '주는'이나 '준'을 본다 하더라도 ‘주다’를 전혀 떠올리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의 2절에서 코퍼스 데이터를 통해 이러한 경향을 양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줄다'의 관형사형을 쓰려고 하다가 엉뚱하게 '주다'가 전달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나를 포함한 언어사용자들은 우회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1) '줄다'의 과거시제 관형사형 '준'을 쓸 자리에는 마치 ㄷ불규칙 용언처럼 '줄은'이라는 활용형을 사용해 버리고,

2) '줄다'의 현재시제 관형사형 '주는'을 쓸 자리에는 (나라면) 의미가 비슷한 합성어 '줄어들다'의 현재시제 관형사형 '줄어드는'을 쓸 것이다.


이제 <폭탄>에 등장한 문장을 다시 보면 1번 전략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은 건 좋은 것 아닌가'라고 하면 독자가 잠깐이라도 엉뚱하게 '주다'를 떠올려 읽는 데 방해를 받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출판되는 소설은 표준어 규범에 따르는 교정 작업을 어느 정도씩 거칠 텐데도 <폭탄> 한국어판의 교정 과정에서 '줄은'이 비표준 어형으로 탐지되지 않았다는 건, 이 전략이 우리 머릿속에 상당히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언어사용자가 경제성을 추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준'과 '주는'이라는 짧은 어형을 두고 굳이 '줄은'과 '줄어드는'이라는 긴 어형을 사용하는 점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줄은'과 '줄어드는'은 '준'과 '주는'이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혼란으로부터 청자를 구하려는 훌륭한 명확성 추구 전략이다.



+ 표준어 기준 '주다'의 어간 모음은 단음이고 '줄다'의 어간 모음은 장음이므로 '주는'과 '준'도 장단을 통해 발음 변별이 된다. 그러나 (1)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모음 장단의 변별이 사라지고 있고, (2)표준어라 하더라도 글로 적힐 때는 장단이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위와 같은 우회 전략은 여전히 활발히 사용된다.


+ '줄다'를 경음화시킨 '쭐다' 또한 '주다'와의 혼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쭌', '쭈는'.


+ '늘다'의 '는'과 '느는'에 대해서도 '늘어나다'를 통한 우회 전략이 존재하는 걸로 보인다.('는' 대신 '늘어난', '느는' 대신 '늘어나는'.) 이 경우는 동음이의어에 의한 리스크가 '줄다'에서만큼 크지 않겠지만, '음운 이웃'에 의한 리스크를 함께 고려한다면 여전히 우회 전략은 쓸모있을 것이다.




2. 우리는 왜 '주는'을 곧장 '줄다'로 해석하지 못하는가? - 코퍼스 분석


'주는'과 '준'에 대한 우리의 해석 편향은 코퍼스를 가지고 간단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결과만 먼저 말하자면, 코퍼스에 등장한 '주는'은 무려 82%가 '주다'의 활용형이고,

'준'이 '주다'의 활용형일 확률은 '줄다'의 활용형일 확률보다 230배 이상 높았다.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몇 번 언급했던 994만 어절짜리 '세종코퍼스 현대문어 말뭉치'에서 '주는'을 찾아 모아 보니 총 8,327개가 검색되었다.

여기에는 동사의 활용형 '주는'만 들어 있는 게 아니고, '소주는', '맥주는' 따위처럼 '주'로 끝나는 체언 뒤에 보조사 '는'이 붙은 어형들도 모두 섞여 있다.


이 중에 '줄다'의 현재시제 관형사형 '주는'을 찾아 보려면 세종코퍼스의 형태소 태그를 활용하여 '줄/VV + 는/ETM'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된다. (/VV는 본동사, /ETM은 전성어미)


'주는'이 '줄다'의 관형사형일 확률은 2/8327

결과는 처참하다. 8,327개의 '주는' 중에서 '줄다'의 현재시제 관형사형은 고작 2개뿐이다.

달리 말해서 '주는'이 '줄다'의 관형사형일 확률은 대략 2/8327이라는 뜻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던 '~주'체언+보조사 구성은 현실의 언어사용자가 통사적/의미적 맥락상 더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으니, 동사 '주다'의 빈도를 보고 나서 분모의 값을 조절해 주는 편이 더 공평할 것이다.


이제 '주는'이 '주다'의 활용형인 경우를 찾아 보자.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언급해야 한다. 우리말의 '주다'는 본동사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수혜를 의미하는 '-아/어 주다' 구문의 '보조동사'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보조동사'는 본동사보다 의미 실질성이 떨어지는 문법적인 요소이다. (종종 문법화의 결과물로 언급되곤 한다.)

그리고 문법 요소의 대표적 특징 한 가지는 어휘 요소들에 비해 훨씬 고빈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범언어적으로 공통된 경향성이다. 영어에서도 최고빈도 단어들은 대개 the, a 등의 기능어이다.)


+ 그러니까 보조동사 '주다'는 내용어가 아니라 기능어 쪽에 더 가깝고, 실질형태소라기보다 형식형태소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학교문법에서는 보조동사든 의존명사든 띄어 쓰는 단어라면 모두 일괄적으로 실질형태소로 분류해 버리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주의해야 한다.


보조동사가 본동사보다 훨씬 고빈도로 사용되는 경향성은 '주다'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VV + 는/ETM'으로 본동사 '주다'의 활용형 '주는'을 검색한 결과는 1,926개였으나,

'주는'이 본동사 '주다'의 관형사형일 확률은 1926/8327


'주/VX + 는/ETM'으로 보조동사 '주다'의 활용형 '주는'을 검색한 결과는 무려 4,929개나 되었다.

'주는'이 보조동사 '주다'의 관형사형일 확률은 4929/8327

(막상 사진에 나오는 ‘나누어 주다’의 ‘주다’는 보조동사가 아니라 본동사인 것 같다. 태그 오류인 듯.)


'줄다'는 2번, 본동사 '주다'는 1,926번, 보조동사 '주다'는 4,929번이다.

본동사와 보조동사를 합치면 '주다'의 빈도는 무려 6,855번이다.


세종코퍼스 현대문어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어 사용자가 '주는'을 말하거나 들을 때 대략 82%가 '주다'를 활용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언어사용자가 '주는'이라는 어형을 접하고서

이 '주는'이 적어도 동사라는 사실을 통사적/의미적 맥락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주' 체언 + 보조사 '-는' 구성일 가능성을 배제했다고 하더라도)

언어사용자가 이 '주는'을 '줄다'의 활용형으로 곧장 인식할 확률은 극히 낮다.



'준'도 들여다보자.

전에 이 글에서 말했듯이 단음절은 여러 의미를 저장해 두기에 유용한 공간이므로,

'준'은 '주는'에 비해 사용빈도도 훨씬 많고 의미도 훨씬 다양하다.

세종코퍼스 현대문어 데이터에서 '준'이라는 음절은 무려 40,656번 등장했다.


대충 둘러봐도 semi 라는 의미의 접두사 '준-'이 우리가 궁금해하는 동사의 활용형 '준'보다 더 많이 보이는데,

분포가 워낙 다르므로('준-'은 어절 맨 앞에 등장하는 의존형식이고 동사의 활용형 '준'은 단독 어절이거나 어절 맨 뒤에 등장한다) '준'의 전체 빈도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여튼 같은 방법으로 '줄다'의 활용형을 찾아 보니(줄/VV + 간/ETM) 총 13개가 검색되었다.

'준'이 '줄다'의 활용형으로 쓰인 경우는 13번


본동사 '주다'의 활용형 '준'(주/VV + 간/ETM)은 총 734번 관찰되었고, 

'준'이 본동사 '주다'의 활용형으로 쓰인 경우는 734번


보조동사 '주다'의 활용형 '준'(주/VX + 간/ETM)은 총 2,319번 관찰되었다.

'준'이 보조동사 '주다'의 활용형으로 쓰인 경우는 2,319번


'줄다' 13 vs '주다' 3,053.

'주는'에서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으나 여전히 거대한 차이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한국어 모어 화자들이 '줄다'의 관형사형을 만들 때 '주는'과 '준'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 '줄은'은 쓰여도 '줄으는'은 쓰이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전에 일본 여행을 갔다가 키노쿠니야 서점에서 구매한 NHK출판 <これならわかる韓国語文法: 入門から上級まで>에는 한국어 모어 화자들이 즐겨쓰는 비표준 활용형들이 잘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 'ㄹ어간 용언'의 비표준 활용형으로는 '길은', '날으는' 등이 등장한다.




+ '줄어들다'와 '늘어나다'로부터

양이 주는(ㅋㅋ) 건 入이고 양이 느는 건 出이라는 은유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다.


+ '줄다'의 활용형으로서 '주는'은 겨우 2회, '준'은 겨우 13회 등장한 반면,

'줄어드는'은 87회 등장하였고 '줄어든'은 227회 등장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코퍼스가 문어 코퍼스뿐인데 문어는 규범적인 성질이 강해서 그런지 '줄은'은 검색되지 않았다. (의존명사 '줄' + 보조사 '은' 구성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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