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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오 김 Jun 04. 2023

2 - 언어의 경제성과 명확성의 경쟁, 정보 전달 게임

인간이 일상에서 쓰는 자연 언어에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없는 이유

  언어 사용의 목적을 정보 전달이라 하자. 사람은 정보 전달이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이 미션에는 최소한 두 사람이 엮여 있다. 화자(speaker)는 정보의 출발점이고, 청자(hearer)*는 화자가 정보를 도달시키고자 하는 목표점이다.


  이때 정보 전달 미션을 수행하는 화자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의도한 정보를 청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간단하게 줄여서 전자를 '경제성'이라 하고, 후자를 '명확성'이라 하겠다.


   경제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귀찮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 사용에서 경제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의 길이는 가급적 짧게 하는 것', '불필요한 말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것(!)' 등이다.

  

  한편 명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누락되는 정보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화자가 의도한 정보의 일부분이라도 전달 과정에서 소실되는 일 없이 온전히 청자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 사용에서는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는 것', 심지어는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등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화자가 추구하는 두 가지 목표, 경제성과 명확성은 서로 충돌한다. 어느 한 쪽을 극단까지 추구할 때 다른 한 쪽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경제성을 극도로 추구한다면 화자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청자에게 어떤 정보가 성공적으로 전달되기를 기대하기는 보통 어렵다. 즉 명확성이 희생되는 것이다.


  '할많하않', '맛없없', '사바사', '별다줄' 등의 줄임말은 화자가 경제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맥락에 익숙하거나 눈치가 매우 빠른 청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줄임말이 명확성을 다소 희생하는 현상이라는 점 또한 명백하다.


  반대로 경제성을 희생하여 명확성을 추구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화자의 정보 전달 미션은 언제나 실패할 위험을 안고 있다. 간단한 예로, 대화가 이뤄지는 장소가 너무 시끄러운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크게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았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화자의 정보 전달 도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청자가 별로 집중력이 좋지 않아서 말을 제대로 듣고도 내용을 머릿속에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일상에서 매우 빈번히 겪는 일이다.


  정보 전달 미션에 도전하는 화자의 무의식은 이러한 리스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자기도 모르게 군데군데에 안전장치를 해 놓는다. 구체적으로는, 청자에게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정보가 누락되더라도 다른 데서 같은 내용을 접하거나 복원할 수 있도록 몇 군데에 중복되는 정보를 넣어 두는 것이다. 이러한 안전장치를 두고 언어의 잉여성(redundancy)이라 한다. (원래 안전장치라는 건 본질적으로 잉여적인 것이다.)


  실제로 언어에서 잉여성의 안전장치가 나타나는 예들은 다음에 소개하겠다. 간단히 예를 들면 일단 이런 것이 있다.


  - 주어와 동사의 일치 (영어의 'she walks' 같은 문장을 보면, 주어가 3인칭 단수라는 정보는 주어 부분'she'에 이미 명시되어 있는데도 동사에서 '-s'를 통해 굳이 다시 한 번 표시해 준다.)


  하여튼 명확성을 지키는 안전장치로서 이미 다른 곳에서 제공한 정보를 중복하여 다시 전달하는 것은 아주 귀찮고 에너지를 필요로 하므로 경제성을 희생하는 일이다.


  이렇게 화자가 추구하는 두 가지 목표, 경제성과 명확성은 서로 충돌한다. 이렇게 한 쪽을 추구하면 다른 쪽이 희생되는 trade-off 상황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언어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한 언어 변화의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번에 다루도록 하겠다.

-> 이 글 참조 

https://brunch.co.kr/@saokim/75



 + 발음하기 불편한 소리를 언어음 시스템에 굳이 넣는다는 것 또한 명료성을 위해 경제성을 희생하는 예로 볼 수 있다.

  러시아어 r, 불어 r 등에 대해 친구가 "왜 굳이 그렇게 발음하기 불편한 소리를 사용하는지" 의문한 것에 대해 대답하면서 덧적는다.


* interlocutor, addressee


+ 본 글에서 소개한 내용은 제가 2019년 2학기에 외대 대학원 영어학과에서 청강했던 이성하 교수님의 '문법화I' 수업에서 배운 내용과 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업 내용을 직접 참고한 것은 아니고 그 동안 다른 몇 가지 소스에서 접한 내용과 제 생각을 섞어 적은 것이므로, 모든 종류의 오류는 온전히 제 책임입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saokim/41




2년 가까이 지나고 보니,

이 글에서 이야기한 '경제성'과 '명확성'이

대략 최적성 이론(Optimality Theory; OT)

유표성 제약(markedness constraint),

충실성 제약(faithfulness constraint)

각각 대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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