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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녀 Apr 23. 2021

언니, 잘 지냈어요?

며칠 전 선배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만이었다. 전화 통화는 거의 1년, 얼굴을 본 지는.... 코로나 이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 2년 이상이 흘러 있었다.

- 언니, 잘 지냈어요? 어디 밖인가 봐요?

- 옷을 좀 환불할 게 있어서 차로 가는 길이야.

- 그럼 운전하고 가야지 왜 전화를 했수?

- 가는데 생각나서 했지. 우리 본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니?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인연이라, 마치 며칠 전에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근래에 언니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언니에게 이상한 기미로 느껴졌을 만큼의 긴 시간 동안.

별 다른 이유는 아니다. 그냥 그 당시에 언니가 나의 연락을 귀찮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세 번쯤 들자 나도 자연스레 연락을 거두게 되었다. 조금 마음이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서로의 삶이 달라졌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서울이지만 꽤 먼 동네에서 각각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로 살고 있다. 오랜만에 언니에게 전화가 온 그 순간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며칠 전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다가 가볍게 공황 상태가 올 듯 힘든 일이 있었고, 그 이후로 이틀째 약한 두통과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날도 오전에 줌 회의를 1시간 치르고 아이가 하교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언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대학 때 정말 친하고 가까웠고, 졸업 이후로도 늘 인생의 길목마다 서로를 지켜봐 주고 함께 해 온 언니였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언니, 나는 잘 지냈다고만 말할 수는 없고, 좋았다 나빴다 하며 살고 있어요. 공황장애가 가끔씩 찾아와서, 불안하고 우울할 때가 자주 있어요. 그래도 무리하지 않고 잘 쉬어주면 다시 보통 상태로 돌아오더라고요. 친정에는 무거운 큰 걱정이 있고, 남편도 건강이 염려되는 점이 있어서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해요. 이 모든 걱정들이 가끔 거대한 공포로 밀려올 때가 있어요. 코로나나 미세먼지까지도 같이요. 우리 가족의 미래에, 그리고 인간의 미래에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혀요. 아이에게도 죄책감을 느끼고요.

 

하지만 기분이 괜찮은 날들에는 또 멀쩡하게 잘 지내요. 행복한 날도 있고 우스운 순간도 있어요. 아이들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 썩 재미가 있고 보람도 있어요. 공황장애로 상태가 좀 안 좋을 때에도 오히려 수업을 다녀오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요.

새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을 때도 있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제대로 잘 켜면 아주 듣기 좋은 멋진 소리가 나는데 그렇게 바른 자세로 켜기가 어렵네요.

요즘은 아이가 학교를 매일 가는 덕에 아이 친구 엄마들을 몇 알게 되었는데 한두 명 마음이 편한 사람도 있어요. 가끔씩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되어서 좋아요.

 

언니는 잘 지내요? 어쩌면 언니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을지 모르죠. 나는 언니의 솔직함, 스스럼없는 태도, 엉뚱함, 날카로운 통찰력 들을 좋아했는데, 언니는 나의 무엇이 좋았을까요? 언니와 내게 생긴 이 서먹한 거리가 흘러가버린 젊은 시절 같아서 마음이 쓸쓸해지네요.

언니, 나는 이제 인생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아요. 아프고 보니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에는 욕심이 많았고 욕심대로 되지 못하는 부족한 나를 많이 미워했었는데요, 나를 미워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대단한 무엇은 없더라고요. '살아있으면 됐다, 이만큼이라도 사느라 애썼다' 이것이 요즘 내가 나한테 자주 해주려는 말이에요.


언니, 문득 20대였던 언니와 내가 보고 싶어 지네요. 그때 우리 좀 촌스럽고 풋풋했었는데요. 키 큰 언니와 키 작은 내가 함께 지하철 창문에 비추일 때면 '서수남과 하청일' 같다고 말하곤 했었죠. 된장국에 참기름을 넣었던 이상한 요리와, 나 몸 아플 때 흰 죽을 끓여 언니가 더 많이 먹어버린 일도 기억이 나요. 그때 우리는 바늘과 실처럼 자주 붙어다녔더랬죠.


한동안 언니를 괴롭히던 불면증은 이제 사라졌나요? 다음에는 우리가 만나 인사치레나 좋아 보이는 이야기 말고, 진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늦은 밤,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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