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기록일지 속 불안
Cortisol ㅣ 코르티솔
몸은 위험을 기억하기 위해 불안을 만든다. 코르티솔이 혈관을 타고 돌며 알려준다. 살아남으려면 지금 이 긴장을 잊지 말라고.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남겨진 수렵 장면은 생존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그곳에 그려진 들소와 사슴들은 단순한 사냥의 기록이 아니라, 식량을 향한 염원, 생존의 기도를 담은 상징이었다. 결핍의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먹는다는 것은 곧 살아남는 것이었고, 신체는 언제나 ‘더 많이 저장하라’는 생리적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잉의 세계를 산다. 편의점의 냉장고는 사계절을 무화시켰고, 한때 축제의 날에나 맛보던 기름진 음식이 이제는 클릭 몇 번으로 집 앞에 도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더 이상 굶어 죽을 위험은 적지만, 과잉 속에서 건강을 잃을 두려움이 우리를 조인다.
이 불안은 단순한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다. 신체의 항상성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인류의 몸은 결핍을 전제로 진화했지만, 사회는 과잉을 전제로 설계된다. 칼로리를 절약하고 저장하려는 본능은 넘쳐나는 음식과 자극 속에서 오히려 독이 된다. 몸은 여전히 과거의 생존 전략에 충실하지만, 환경은 전혀 다른 계산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다이어트는 이 불일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적게 먹으려는 노력은 본능과 사회 모두에 저항하는 과정이다.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축적을 명령하는 유전자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먹음으로써 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주의 구조에 저항한다. 매일의 식사 기록은 단순한 칼로리 계산표가 아니라, 개인이 환경에 맞서 어떤 균형점을 찾아가는 전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전투의 현장은 단순한 식탁 위가 아니다. 밤마다 불이 꺼진 주방에 서서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한다. 한 조각 초콜릿, 한 모금 와인, 혹은 그냥 잠을 자버리는 선택. 이 작은 결단들이 쌓여 몸과 마음의 풍경을 바꾼다. 그러나 몸무게가 줄어도, 옷이 헐렁해져도 마음속 불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코르티솔이 여전히 몸을 순환하며 생존의 긴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불안은 원시 시대의 긴장과 닮았다. 다만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에는 굶주림의 공포가, 넘치는 시대에는 선택의 공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우리는 몸을 관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시하고, 데이터와 수치를 통해 자신을 통제한다. 미셸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권력은 외부에서 강요되지 않고 내부화된다. 체중계와 칼로리 앱이 감시자가 되고, 우리는 스스로를 벌주고 보상하며 살아간다.
알타미라의 인류가 그렸던 들소와 사슴은 생존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기록하는 ‘섭취 칼로리’와 ‘체중 변화’라는 숫자들은 그때와 다르지 않게 간절하다. 다만 방향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결핍에서 과잉으로, 생존에서 통제와 이상화로. 그러나 결국 이는 같은 불안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살을 빼는 기술이 아니라,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조율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 조율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항상성은 흔들리고, 우리의 몸은 여전히 과거에 살며, 사회는 미래를 강요한다. 그 틈새에서 불안은 자라난다.
그렇다면 이 불안을 없애는 길은 단순히 더 강력한 의지나 더 정교한 식단 계획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 결핍과 과잉, 본능과 사회 사이에서 영원히 흔들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을까. 알타미라의 그림을 떠올린다. 수만 년 전의 불안이 우리와 겹쳐질 때, 다이어트라는 행위는 단순한 몸매 관리가 아니라 인류학적 명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