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어라?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멍청한 화석이 됐네?
바로, 20세기 카프카의 <변신>이 21세기에 실현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내 대뇌피질은 책을 읽는 그 순간만 겨우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간신히, 눈곱만큼.
그렇게라도 인간에게 부여된 신피질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름도 모르는 옆집 고양이나, 304호 강아지와 무엇이 다를까?
(혹여 그들과 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굳이 따져보는 건 피하고 싶다.)
나름 안목이 까다로운 나는
유발 하라리, 칼 세이건, 유시민이 쓴 글이 아니면 끝까지 읽지도 않는다.
매력 없는 문장을 붙들고 있을만큼 여유롭지도,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시력이 감퇴하고, 1년에 한 번씩 안과를 들락날락하며
“노안”이라는 단호한 진단명만 들고 나올 때,
나는 생각했다.
읽기에 필요한 신체는 노화되는데,
세상은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나는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 불안 속에서,
내가 찾은 단 하나의 처방전은—책이었다.
칼 세이건은 말했다.
“인간의 공포 본능이 지능 발달에 유리했을 것이다.”
불안은 생존의 본능이었고,
그 불안을 이해하고 조율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지식, 관찰, 그리고 사유였다.
하라리는 <21가지 제언>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여기. 21세기의 사피엔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구체화하지 못하던 그 질문들.
그 앞에 마주 선 나는,
비로소 눈이 조금씩 떠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 책은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처럼 충격적인 신선함은 덜하다.
이미 익숙한 통찰, 반복되는 개념, 다소 추상적인 결론들.
“명상하라.”
“교육이 중요하다.”
“의미를 찾으라.”
알겠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 당위는 분명하지만,
구체성의 부재에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역시 이 시대의 진실일지 모른다.
변화는 유일한 상수이고,
그 변화조차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하라리는 우리에게 한 토막의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1848년,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
2048년, 젠더도 정체성도 유동적인 가상공간의 인간
3D 게임에서 의미를 찾던 자조차
AI에게 직업을 빼앗기고
알고리즘이 짝을 찾아주는 세상
그리고 말한다.
“심대한 불확실성은 결함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이다.”
하라리는 조심스럽게 조언한다.
“어른들의 말은 믿지 마라.
기술도 믿지 마라.”
시대에 뒤처진 어른들의 조언은 종종 해악이 되고,
기술은 인간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스스로의 감정과 정신을 단련해야 한다.
균형. 탄력성. 내면의 회복력.
그것이야말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는 진짜 무기다.
나는 여전히 묻는다.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하는가.
왜 나는 이토록 외롭고 불편한 인간인가.
세상이 휙휙 지나간다. 까딱하다간,
"어라?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멍청한 화석처럼 굳어졌네?"
바로, 20세기 카프카의 <변신>이 21세기에 실현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묻고, 읽고, 쓰려 한다.
수십 년 후엔,
이 모든 질문이 무용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질문들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질문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중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 하라리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읽는 자는 언젠가 바뀐다.
질문하는 자는, 언젠가 도달한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궁금한 채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궁금함이,
오늘도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끈다.
그게 내 생존 방식이고,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택한 태도다.
나만의 에우다이모니아!
그리고 당신은,
오늘 어떤 질문으로 버텼나요?
* 이글은 사피엔스 시리즈 마지막 3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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