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과 성숙한 삶에 대하여

by 이동훈

사람이 죽을 때 과연 무엇을 느낄까. 사람이 죽을 때 21g이 감소한다고 한다.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영혼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우리 모두는 영혼과 일대일 대응이 된 것처럼 교류하고, 영혼이 지속적으로 붙어있는 채로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보기도 하고, 영적인 것에 이끌려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처럼 인간에게 ‘영적인 요소’란 지금도 풀리지 않은 과학적인 난제이자, 신학적 주제의 핵심이다.


영성은 단련되고 성숙해지는 요소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의 젖을 물고 울며 소리칠 때 그 아기에게는 이미 한 인간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을지라도, 육체의 오감을 통해 영혼과 닿을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지켜주는 여러 신들과 접촉 할 수 있게 된다. 희랍 시대에 존재했던 델포이 신전에는 무녀라는 직업이 있었다. 신탁을 받아 인간들에게 예언된 내용을 전해주는 무녀인데, 당대 사회가 뮈토스라는 신 중심의 질서였으니, 그들이 영혼을 믿고 신을 숭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산업과 문명이 이룩되면서 신과 영혼에 대한 개념은 점점 축소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은 비물질적인 것이며,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과의 의견을 나누는 대화의 장에서 영혼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거나, 뜬금없이 신과 관련된 주제를 논한다면 그룹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만큼 현시대는 이런 영적인 요소와 괴리 되어 있는 실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든 또는 믿지 않든 영성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은 늘 꾸준히 있어왔다. 티벳 불교에서 발견된 파마드 삼바바의 ‘사자의 서’라던지, 이집트 고대 신화라던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윤회설 등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영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관심을 끄는 주요한 소재에 해당했다. 이런 정신적인 가치가 많이 약화된 현시대에 인간의 희노애락을 논하는 것은 따분한 종교적 잡설로 보이기도 한다. 종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날이 세력이 약해지고 있으며 사회는 파편화되고 분리되고 있다. 이에 따라 공동체의 연결은 점차 느슨해지고 있다.

영적인 요소는 분명 우리를 하나로 합쳐주기도 하며, 각 개인의 삶을 보다 높은 지점으로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신플라톤주의 학파였던 플로티노스는 학당을 만들어 자신과 학생들의 영혼을 수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표면적인 가치보다는 보다 본질적이고 인간 내면에 내재된 중심적인 가치에 맞닿는 행위에 해당한다. 영혼의 고매함, 사랑, 인류애, 우정과 인생에 대한 고뇌 등 다양한 범위로 변주되어 우리에게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우리의 세대가 저물고 미래의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되면 그때의 사회는 이 영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터부시하는 요소라 생각하여 과학의 질서 반대편으로 몰아내게 될까, 아니면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보다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까.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고민거리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애의 관점에서는 과거 세대와 현세대, 그리고 미래 세대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선상에서 흐르는 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나날이 무더워지고 지구의 변화가 심상치 않은 요즘, 영적인 삶은 사람들 사이에 끊어진 연결 고리를 강화시키고, 유대감을 증진시켜 우리의 공동체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 기쁨, 슬픔, 죽음과 노화까지 삶의 국면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은 모두 우리의 내면에 내재된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달아날수록, 우리의 인생은 불행으로 점철되고 피폐해진다. 이런 상황일수록 깨어남이 필요하다는 것은 짐짓 자명해 보인다. 이는 전지구적인 흐름이자,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흐름에 해당한다. 타인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면 영성과 현실이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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