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남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며 남들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굉장히 쉽지 않은 삶일 것이다. 모두가 완벽을 바라고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스스로만 도태되고 남들의 속도와 맞추지 못해 뒤쳐진다면, 사람들의 비판과 채찍에 끔찍한 삶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세대가 이런 구조적인 시대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자신만의 속도로 꿋꿋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과 원칙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사유와 방향으로 삶을 탐색하며 성장해나간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변방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이방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 그들은 속세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반드시 많은 돈을 벌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목표와 인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지향한다. 사주 명리학에서는 이들을 편인 도식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만의 개성과 인장을 세상에 찍음으로써 개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삶을 모두가 똑같이 나아가는 이인삼각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각 개인 고유의 개성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세상에는 늘 찬반 대립이 존재한다. 어떤 의견이 존재하면, 그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지적 격투와 적절한 사유 속에서 논쟁이 진행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폭력이 동원되거나, 세력이 나뉘어 서로를 겨냥해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여당과 야당의 대립이라던지, 회사 내에 존재하는 노조에 대해 사측과 노동자측이 갖는 의견의 대립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삶은 쉽게 재단할 수 없을만큼 복잡다단하고, 찬성과 반대라는 의견의 반반은 우리의 삶을 이루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세상의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암묵적인 공격을 통해 이방인들을 사회의 원래 기준으로 다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에 속한 존재들이고, 사회를 구성하려는 요소를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기에 어떤 사람이 공동체를 저해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을 축출하려든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아테네 민주정의 정치인들을 떠올려보면 생각하기 쉽다. 어떤 사람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는 시선을 보낸다면 그는 해당 사회에서 위협으로 간주된다. 기존의 질서를 반대하려는 자, 사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비춰지는 것이다.
현대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개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대’라고 불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옛적부터 지금까지 이 개성과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투쟁했으며 결국 지금이라는 시점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회가 안착 되었다. 어떤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다수에 반대되는 의견일지라도, 사회의 기준과 다른 제안을 대시하거나 공동체의 기존 관점과 궤를 달리 하더라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권리는 사회가 태동하는 것이 필연적이듯, 이 또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관에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 기독교 사회에서 파문을 당했다. 브루노는 화형을 당했으며, 데카르트 역시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만 했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새로움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색다른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개성이 유지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사회가 다원화되고 우리의 의식이 나날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할 권리가 국민들 다수에게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이정표이자, 삶의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효과적인 방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