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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May 10. 2020

어머니의 의자

"이거 이제 버리는 게 어떨까?"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시작된 봄빛이 7층 베란다까지 올라오던 3월의 어느 휴일, 베란다를 청소하기 위해 구석에 있던 낡은 의자를 옆으로 치우던 아내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베란다도 널찍한데 굳이 왜? 그거 버리려면 돈 내야..."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아니다, 이젠 버리자." 난 성큼 베란다로 들어가 의자를 밀다시피 들고 나와 현관에 내어 놓았다.


7년 전 이맘때 즈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른 건 다 정리했으면서도 그 의자만큼은 쉽게 버리지 못했다.
내가 아버지가 된 이후에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아버지의 횡포에 못 견뎌 빈손으로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나와 온갖 고생을 다하신 어머니였다. 
누군가는 히말라야 8천 고지를 오르는 등반가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경외스럽다 했지만, 삶의 전문가도 아니고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것도 아닌, 그렇다고 삶을 포기할 수 있는 혼자 몸도 아니었던 어머니의 신산한 삶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친척에게 빌린 몇십만 원으로 작은 가게를 열면서 또 다른 고된 삶을 시작하셨다. 
소변이 마려워도 가게를 비워놓지 못해 참기가 일쑤였고 삼 남매가 공부로라도 성공하길 바랬기에 이웃에게 부탁할지언정 아이들에게는 가게를 봐달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으셨다. 
어린 세 자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애쓰시는 어머니의 고생을 알면서도 겉으로 드러내면 귀찮은 가게 일에 매이게 될까 봐 모른 체했다. 
연약한 몸을 혹사시킨 지 여러 해, 자주 넘어지시고 손발을 떠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간 대학병원에선 여러 번의 검사를 거쳐 파킨슨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고칠 수 없으며 다만 진전을 늦추는 약물 처방이 현재로서는 최선일 뿐이라는 통첩만 건조하게 전해 주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혼자 걸으시는 것도 그로부터 반년 정도에 불과했고 이내 손발은 굳어져서 혼자서는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식도와 기도마저 점차 굳어 가는 바람에 가래를 빼내려고 목에 구멍을 내고 튜브를 꽂게 되었고 결국 그 길로 자리를 보전하기에 이르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침대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시며 세상과 단절하게 되었다. 
면벽 수도하는 고승도 아닌 어머니가 벽만 바라보고 누워 계시는 게 답답하실 듯해서 베란다에 놓을 푹신한 소파 형식의 1인용 팔걸이 의자를 구입했다. 
고된 삶만 허락했던 세상이 뭐 그리 좋다고 보고 싶어 하실까마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하늘과 바람의 기운이라도 느끼게 해 드리려는 마음이었다. 
베란다 창문 바로 앞에는 낮은 산과 숲이 있어 눈과 코로도 충분히 사계절을 맛보실 수 있었다. 
의자가 도착한 건 아직 초록빛은 기미도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들 끝으로 올라오는 봄기운만 느껴질 때였다. 
의자를 베란다에 들여놓고 어머니를 안아 처음 앉혀 드리자 몇 개 남지 않은, 그나마도 다 썩어 반도 남지 않은 치아를 드러내시며 마치 설빔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물론 평소의 그 말은 잊지 않으신 채.
"비싸겠다. 너네 힘든데 나 때문에 돈 쓰게 해서 미안해."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몸은 점점 더 굳어갔다. 
의자에 앉혀 드리면 누워만 계시던 몸을 세우는 게 힘드셔서 목에 낸 구멍의 삽입관에선 씩씩거리며 거친 숨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들은 내가 행여 당신을 위한답시고 침대에 다시 눕힐까 봐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애쓰시는 게 여실히 보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베란다 나들이 횟수는 점점 줄고 간격도 멀어져 갔다.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는 걸 핑계로 삼았지만 사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옛말을 나 역시 하나의 사례로 증명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자리보전하신 지 4년여 만에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염하던 날 작은 나무 상자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대던 때의 낯선 차가운 감촉은 수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미리 마련한 공원묘지에 어머니를 모시던 날은 옆 무덤의 비석에 머리라도 박고 싶을 만큼 영원한 이별이라는 절망과 엄청난 상실감에 발버둥 치며 울었다.
그냥 우는 것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고 몇 걸음 물러서 있던 친지들에게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어느 정도의 큰일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관이 땅속에 내려지고 그 위로 흙이 뿌려질 때는 마치 내가 그 관 속에 들어있는 양 호흡이 컥컥 막혀왔다.
그 충격적인 경험은 삶이 버거워 이승의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훗날에까지 큰 힘을 발휘했다.
숨이 끊어진 후에는 염을 하든 관에 들어가든 컴컴한 땅속에서 썩어가든 전혀 알지 못할 텐데도 그 두려운 기억에 차마 스스로 이승을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버거운 삶이라도 개똥밭에 구르는 여기가 그나마 덜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다른 유품은 다 버리고 태웠지만 의자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거기에 앉아 거친 숨소리를 죽여가며 베란다 밖을 물끄러미 쳐다 보시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그 의자에 앉지 못했다.
정확한 실체도 없이 막연하게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혼령만큼은 의자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 혼령이 내게 겹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꽤나 유치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현실화시켜 매번 지는 쪽을 택했다.
그건 지나는 길에 가끔 들리는 어머니의 묘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맨손으로 잡초를 뽑아내면서부터 시작되는 스멀거리는 기운은 못 드시던 소주 대신 우유 한 팩을 무덤에 뿌리고 나서 기도를 바칠 때에도 팔뚝에 소름을 돋게 했다.
내 앞에 봉긋이 솟아있는 흙더미 속에 누워 있을 어머니는 생전의 그리운 어머니가 아니라 썩어가거나 백골일 거라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건조한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어머니가 아닌 백골이 어느 순간 흙을 헤치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은 상상이 공포 영화의 기억을 빌어 떠올랐다.
그래서 어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차로 돌아올 때는 무덤에서 무언가 나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등 뒤로 기어 올라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 두려움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수십 년을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때로는 죽든 살든 그 두려움에 잡혀서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놈은 굳이 날 잡거나 잡혀서 숨바꼭질 놀이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난 아직 어른이 못되고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다.

낑낑대며 현관 앞까지만 내놓은 의자는 몇천 원짜리 스티커를 붙여야 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파트 입주민들의 온라인 카페에 가져가라고 올리기는 싫었다.
의자의 내력을 감춘 채 이웃에게 선심 쓰듯 주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몇천 원이라도 아낄까 하는 지질한 생각을 어머니와 아내는 알 것 같았다.
"여보, 그냥 내가 앉을게. 돈 주고 버리기도 그렇고..."
"아니 왜? 무섭다고 한 번도 안 앉았잖아?"
"무섭긴,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그냥 앉으면 되지 뭐."
근 30년을 함께 산 아내에게 굳이 거짓말을 해봐야 소용없을 일이지만 하등 쓸모없는 나이를 들먹이며 의자를 다시 베란다로 옮겼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엉덩이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의자는 생각보다 푹신하고 편안했다.
등을 대고 머리를 기댄 채 창밖으로 봄기운이 올라오는 숲을 바라보았다.
순간 따스한 기운이 머리부터 서서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머니의 홀로그램 영상과 겹쳐지는 듯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도 없고 쪼그라든 손발도 아닌 예전의 곱디고운 어머니의 느낌 그대로였다.
갑자기 울컥하며 목구멍 깊숙이 시린 느낌이 들며 눈 앞이 흐려졌다.
아마도 내 생애에는 이 의자와 헤어지기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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