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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Apr 05. 2022

퇴직 후 이모저모 - 16

이왕이면 희망

직장을 다니든, 퇴직을 하든, 퇴직 후 새로운 일을 하든 그도 아니면 그저 어찌할 줄 모른 채 무기력하게 끌탕을 하든 다 제각기 결정할 일이다.

선택의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있든, 결정이고 뭐고 어찌할 재간조차 없든 매 순간의 삶 또한 제각각이다.

난, 재능도 그다지 없으면서 욕심만 많아서 뭔가 해보려고 무지하게 바둥거렸다.

30년의 직장 생활과 연결된 일은 기회가 오지 않았고, 설령 그럴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거절했을 거다.

명예퇴직을 선택한 이후의 후회가 고통스러워서 그 어떤 연결고리도 내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면증...

마흔 무렵부터 시작된 불면증은 수면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계속 먹으면 내성이 생기고 중독될까 봐 겁이 나 먹다 말다 하다 보니 그 언제부터는 전혀 효과가 없게 되었다.

잠드는데 1~2시간은 기본이고, 꼴딱 밤을 새운 적도 빈번해졌다.

어쩌다 운 좋게 잠이 들게 되면 새벽 3~4시에 깨게 되고 일단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이런 상태니 낮에 운전하게 되면 거의 가수면 상태에서 운전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휴게소 등에 차를 대고 잠시 눈을 붙이려고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신기하게도 운전석 의자를 젖히고 눈을 감으면 파노라마 영상이 흘러 가느라 뇌가 쉬기는커녕 열 일하는 중이었다.

누군 그러더라.

며칠 못 자면 저절로 자게 된다고.

그럴 수 있는 분은 참 부러운 양반이다.

주변에서 걱정하면 난 호기롭게 대답했다.

"잠은 무덤 속에서 충분히 잘 수 있다고..."(세상 건방진 소리 ㅉㅉㅉ)

불면증은 내게 많은 걸 빼앗아 가기도 했고 많은 걸 주기도 했다.

기억력은 점차 나빠져서 요즘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치매환자라고 놀려도 찍소리 못한 채 인정하게 되었고,

24시간 윙윙거리는 금속성의 이명과 함께 날카로운 성격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 놈의 날카로운 성격은 바깥에서는 소심한 성격 탓에 애써 감추고 집에 와서 애꿎은 아내에게 한꺼번에 다 풀어놓았다.

불면증의 이유?

스스로는 생각이 많아서라고 진단했다.

물론 그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들이었고 한 번 떠오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편영화로 상영되는 거다.

거의 모든 생각은 부정적인 결말을 향해 가는 거라서 가뜩이나 걱정을 안고 사는 내게 불면증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의 지난날은 어찌 그리 잘못 투성이고 부끄러운 일로 가득 찼는지 그러한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공격하는 바람에 잠 못 드는 나를 더 엎치락뒤치락하게 만들었다.

내 탓이니 어디다 화풀이할 수도 없고...ㅠㅠㅠ

그래서 반년 전에 수면다원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수면무호흡증이 있단다. 생각지도 않는 코골이까지 있고.

결국 양압기(강제로 바람을 코에 넣어주는 기계)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더 걱정되는 건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심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울증 약도 처방받았다.

그 이후 제법 잠자는 시간이 늘었다.

기대만큼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거의 1.5 배 정도 되는 시간을 잔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좋아지지는 않고, 이명 또한 줄거나 사라진 건 아니다.

하긴 이명 때문에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들의 답변을 종합해 보면 이명 없애는 사람은 노벨 평화상이나 의학상을 받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른다.

십수 년을 함께 한 기억력 감퇴와 이명은 이젠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고 있다.

덕분에 핸드폰의 스케줄 앱에는 빽빽하게 일정이나 기억해야 할 것들이 적혀 있다.

정작 그걸 들여다보는 거 자체를 까먹는 게 문제긴 하지만.ㅎㅎㅎ


퇴직 이후 이러저러한 일들을 전전하다가 이젠 어떤 일에 정착했다.

아직 대단한 수입은 아니지만 일도 재미있고 적당한 수입도 종종 올린다.

시간이 흐르면 경험과 실력이 쌓일 거라는 기대를 갖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식구가 4명이나 늘었다.

하루 종일 매여 있지 않아도 되는 시간적으로 아주 여유로운 일이라 더 마음에 든다.

오전이나 오후에 약속이 잡히면 나가서 30분 정도 상담하고는 집에 와서 몇 시간 쉬다가 사무실에 나간다.

쉬는 동안 책도 읽고 끄적거리기도 하고 일과 관련한 공부도 한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없는 일은 아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사람 상대하는 일이 다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넉넉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


난 책 읽기를 좋아한다.

지적 허영심이 많아서 무언가를 채워야만 하는 성향이다.

굳이 그걸 허영심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하고 싶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구절이 있다고 열심히 주절거리고 싶어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진정한 이유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내게 지적 허영심 충족의 도구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가치를 주는 거였다.

그건 힐링이다.

동서양의 철학이나 역사서, 자기 계발, 과학서적 등을 읽다 보면 힐링이 됐다.(허영심 충족으로 인한 힐링이겠지만)

특히, 자기 계발서는 그랬다.

그 책에서 제시하는 성공을 향한 실행지침은 전혀 따라 하지 않으면서도 읽을 때만은 나도 성공할 거 같은 희망을 갖는 거였다.

내게 자기 계발서는 진정한 자기 계발을 위한 책이 아니라 현재의 불안한 마음, 충족되지 못한 욕심으로 인한 우울증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강력한 치유제였던 것이다.


아내도 책 읽기를 좋아해서 주말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며 함께 책 읽기가 일상이었고, 캠핑을 가서도 자연 속에서 책 읽는 것이 당연했다.

시간만 나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여러 권을 골라와 탁자에 쌓아 놓으면 미처 읽기도 전에 뿌듯했다.

그래서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가족들만의 독서클럽을 시작했다.

그때는 일주일에 2권씩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그것이 끝나면 아무 주제나 정해서 10분 글쓰기도 했다.

4~5년 정도 지속하다가 작은 아이가 기숙사 학교를 가면서 잠시 중단했고 대학생이 된 지금 다시 시작했다.

누군가 '그래서 지금 살만해졌냐'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ㅎㅎㅎ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경제적 자유로 늘 불안하고, 우울증 때문인지 만사가 귀찮아져서 독서토론을 거르기도 하고 순간 날카로워져서 식구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라도 책을 읽음으로써 이 정도 버티는 게 아닐까 하는...


명예퇴직을 하던 당시의 극심한 불안(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족 뒷바라지는 어찌할까?)은 3년간 큰 변화 없이 지금에 이르렀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살아왔다.

젠장... 걱정하느라 몸만 상했다.

괜히 그랬다.

그래서 계속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고 시도하고 있다.


요즘 뉴스로 전해 듣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참 가슴 아프다.

우리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죽고, 다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향을 떠나 피란길에 오르고...

푸틴의 선택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삶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 아닌가.

그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국민이나, 푸틴이나 앞으로의 길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를 거다.

그러다 보니 우리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어려서부터, 또는 10년이나 5년 전에 계획한 모습이진 않을 거다.

계획한 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작은 사건 하나로 살짝 방향이 바뀌고, 또 그 길로 쭈욱 오다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방향을 틀기도 해서 지금에 이르렀을 거다.

생각보다 나쁜 현재인 경우도 있을 테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 앞날이 어찌 될지는 난 모르겠다.

계획을 아무리 잘 짜도 그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더 좋을 수도, 더 나쁠 수도.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인 듯하다.

그러니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사는 게 맘 편하겠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을 삶, 알지 못할 미래의 삶인데 애면글면 걱정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그게 말처럼 쉽냐마는...ㅠㅠㅠ)

내 어린 시절의 환경이 무엇이었기에 이리도 걱정을 안고 살았는지, 그 아까운 젊은 날에 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이리도 많은 후회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또 다른 삶이 펼쳐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련다.

그게 좋은 삶이든 아니든 내가 결정할 영역 밖이라 생각하고 그저 매일매일 잘 살기만 하련다.

아침에 10분만이라도 스트레칭하고,

매일 고객을 만나고,

업무와 관련한 공부도 적당히 하고,

좋아하는 책도 매주 한 권씩 읽고,

벽에 써서 붙여놓은 주문도 큰 소리로 읽고,

집에 들고 날 때마다 내가 믿는 신에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말하며 살련다.

그리고 매일 아내와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꼭 끌어안아주련다.

이젠 그게 내 삶의 목표다.

언제까지 얼마를 벌어야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지... 는 버려야겠다.

잡히지 않을 먼 훗날의 목표 아닌 목표 때문에 지금 누려야 할 삶을 걱정으로 덮지는 말아야겠다.

삶에 별다른 목표가 있겠는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삶의 목표인 거고, 그런 과정 자체가 삶인 거지.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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