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Jul 31. 2024

자녀교육 - 4

영재학교

"일반 학교로 전학 갈래."

영재학교 입학 후 중간고사가 끝났을 무렵인가? 아이를 데리러 금요일 저녁에 학교에 간 우리를 만나자 아이가 울면서 한 말이다.

(영재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2주에 한 번씩 귀가한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다는 거였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중인 7월에 합격자 발표가 난 후 입학하기까지 7개월 남짓 되는 시간을 어찌 보내느냐가 사실 대학 입시에 무척 중요하다.(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이는 그 7개월의 기간 동안 신나게 지냈다.

이 또한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대다수의 합격생들은 학원에서 7개월을 빡세게(?) 보낸다.

학 후 첫 중간고사 성적이 졸업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며 입학 후 첫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등수)이 나오려면 합격한 즉시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과의 경쟁이다 보니 석차 한 칸 올리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합격생 엄마끼리 단톡방을 만들고 학원과 협의해서 합격생 반을 따로 만들어서 입학 때까지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다.

아이가 다녔던 학원 영재반 학생 12명 중 아이합격하다 보니 그런 단톡방이 만들어질 리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런 연락이 왔다고 해도 뭣도 모르는 내가 거절했을 거다.

그 덕분에(?) 아이는 7개월 동안 행복하게 놀았다.

(동시에 두 길을 갈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 어느 편이 잘한 건지 모르겠다)

보컬학원도 다니고 작곡 학원도 다녔다.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대학가요제나 버스킹도 했으면 했고, 예술적 소양을 쌓았으면 하는 욕심에 은근슬쩍 떠밀었고 아이 또한 원했기에 재미있게 다녔다.

남은 중학교 생활도 재미있게 했다. 욕심이 많고 칭찬받기에 익숙한 아이라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는 늘 그러하듯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에 중학교 전체 1등으로 졸업했다.

(사실 확실하진 않다. 그럴 거라 추측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경기도지사 상을 받았고 다른 아이는 시장 상을 받았는데 시장 상의 상패가 더 예뻤기에 시장 상이 1등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어느 게 1등 상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그걸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더 높은 사람이 주는 상이 1등 상 아닌가 편파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어쨌든 7개월 간 신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다른 아이들은 7개월 간 입학준비반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 온 거다.

그러니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 힘든 건 물론이었고 처음 본 시험 결과가 기가 막혔던 거다.

정확히 중간 등수였다.

그때만 해도 아이는 의사가 목표였다. 피아노 잘 치는 의사...

(그런데 우리가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게 영재학교는 의대 진학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공계 인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영재학교법까지 만들어서 특별히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의대에 진학하고자 하면 그동안 받은 혜택을 다 뱉어내야 한다. 게다가 거의 100% 수시전형으로 진학하는데 학교에서 의대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또 다른 차별이고 학생의 자유 선택을 막는 거다 보니 늘 논란거리 일 수밖에 없어서 학교마다 대처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들에게도 추천서를 써 주는 대신 최상위권 몇 명에 국한하고 지원할 수 있는 6개 대학은 모두 의대로만 한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아이는 첫 성적표를 받아 들고는 용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의대 진학에 더 유리할 거라 생각했을 고, 중간 정도 등수를 처음 받고는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가 났을 수도 있었을 거다.

현실적으로 영재학교에는 나름 중학생 때 최상위권에 있던 아이들만 모여 있을 거고 정작 영재학교에 와서는 어쩔 수 없이 1등부터 꼴등까지의 성적을 받아 들 테니 꼭 우리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게다.

그렇게 펑펑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그러자, 전학 가자"고 말했다.

울음을 멈추고 참 지나서야 아니라고, 버틸 거라고 말했다.(스스로에게 한 다짐이었을 거다.)

그렇게 시작된 영재학교 생활은 졸업 때까지 숱한 갈등과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성적에 대한 실망과 낙담은 매 시험 때마다 반복되었다.

(졸업 때 성적은 처음 중간고사 등수보다 3~4등 올랐다. 이미 공부에 관한 한 상당 수준의 지식이 꽉 들어차 있고 엉덩이 힘 또한 얼추 비슷한 아이들이라 한 칸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다)

성적만이 고민의 전부는 아니었다.

2인 1실의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의 관계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이는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깔끔했다.(까칠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룸메이트가 정해지면 1년간 함께 지내는데 그 친구와 성향이 다르면 곤욕을 겪었다.(깔끔 떠는 아이도, 수더분한 룸메도 서로 고역이었겠지)

또한, 19금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친구들과의 그러한 대화에 끼지 못하거나 단어나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약간의 미숙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어떤 친구는 그런 아이를 내숭 떤다고 했단다)

그건 사실 아이가 막내라서 우리가 끼고 산 탓이기도 하다.

22살이 된 지금도 한 침대에서 엄마 손 잡고 자면서 옛날 이야기해 달라고, 엄마의 되지도 않는 엉터리 이야기를 들으며 잠드는 아이로 키운 우리 탓이 컸다.

게다가 어디서 받은 영향인지 모르지만 아이의 표현을 빌면 완전 '유교걸'이다.

은 치마나 바지는 아예 입지 않았다. 허연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게 부끄럽다는 거다.

스스로 모태솔로임을 아쉬워하면서도 대시하는 남자아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가 대학 입시준비로 정신없던 고3 때 뒤늦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 사귄다고 해봐야 학원 수업 쉬는 시간에 잠깐 편의점 데이트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사귄 지 134일째 되는 날 우연히 학원 끝날 시간에 데리러 간 우리가 둘이 쏙닥거리는 걸 보게 되었고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아이가 사귄 지 135일 만인 그다음 날 이별을 고했다. 첫 남자 친구이라선지 무척 힘들어했다. 어찌하다 사귀게 됐냐고 했더니 남자아이가 먼저 사귀자고 했단다. 그래서 아이도 좋다고 했고... " 여러 번 대시하는 아이들을 다 뿌리치더니 어째 오케이 했다니? 하는 물음에 같은 밴드 동아리에서 합이 잘 맞았고, 전교 1등인 데다가 키도 아주 컸다고... 추가로 덧붙이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 아이 집안이 엄청 부자라고... 어쩜 그리 본능적으로 계산적인지...ㅎㅎ)

그렇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친구들과의 잡다한 일들을 겪으며 어느덧 3학년이 되어 대학 수시 입시가 다가왔다.

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인 고3 여름방학 때 대치동에 있는 학원에 다녔다.

(수시 서류전형에 합격하면 면접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게 과거의 대학 별 본고사 같은 또 하나의 필기시험이라는 걸 알았다. 면접이라기에 순진하게 인터뷰인 줄...ㅋ)

밤 10시에 학원 근처로 처음 데리러 간 날, 앞에서 음주단속을 하거나 큰 사고가 난 줄 알았다.

왕복 8차선의 양방향 도로가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알고 보니 학원 간 자녀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의 차였다.

그리고 10시가 되자 모든 건물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아이들...

영화 '부산행'의 좀비 떼처럼 수천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대치동 학원가라는 거구나 놀라며, 학원에 들이는 저 돈은 다 얼마며 저 아이들은 다 원하는 대학에 갈까? 하는 하등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괴한 소용돌이 안에 내가, 내 아이가 있다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 아이만큼은 성공하겠지?라는 당연히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학원비?

음... 글쎄다... 그냥 많이 들었다. 내게는...(누군가는 이 난리법석을 떨지 않고 최고 실력자를 집이나 다른 공간에 초빙해서 고액의 개인수업을 받기도 하겠지?)

자본주의에서는 대체로 성적도, 대학 간판도 돈으로 사는 게 맞는 듯하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내는 숫자는 통계적인 의미가 없을 만큼 적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

결국 부모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대치동 학원가에서 밤 10시가 넘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숫자로 봤을 때 투자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설령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장래에 투자금이 부모에게 다시 돌아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바라고 지원해 주는 부모는 없겠지만 나중에 부모가 늙고 아이가 사회에 나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기대하는 바가 생기는 게 인지상정일 테니.


옛말이 떠오른다.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라는.

그래도 소나무는 뿌리가 땅에 박혀서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 지금은 사회적 기준에서 성공하든 아니든 부모 곁에서 봉양하는 시대가 아니니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리 기대하는 부모도 우스워진 세상이긴 하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돈을 마련해서 오로지 자녀의 대학입시에 쏟아붓고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돈 많이 벌어 너만 행복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공부, 공부, 공부하라고 읊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들을 수 있는 단어의 수가 10가지 정도라고.

"일어나. 학원 가. 숙제는? 공부해... 공부해... 공부해..."

우리가 살아온 시절과 지금은 엄연히 다른데도 내가 살아온 시대의 기준에서 얻어진 잘못된 기준을 아이에게도 주입하고 있는 거다. 아직은...

그리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거니까 현재의 행복은 그때까지 유보하자며 셀프-가스라이팅 중이다.

누굴 탓하겠는가? 그래야 내 아이가 행복해지고 따라서 부모도, 가족도 모두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세태인데 어찌...?

그 누가 이 폭주 기관차 같은 세태를 멈추겠는가?


그 학교 아이들 역시 그러하듯 속세의 순서대로 5개 대학에 지원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다행스럽게도(?) 4개 대학에 합격했고 서로 다른 날로 안배된 2차 면접시험과 인터뷰(일부 학교)를 보러 다녔다.

새벽부터 폭설이 내린 날이나, 갑작스레 한파가 밀어닥친 날이나 그 어떤 날에도 변치 않는 건 부모들 모습.

안쓰러운 눈길로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몇 시간을 서성이며 기다리는 모습은 한결같았다.

다들 각자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을 게다.

"실수하지 말고 아는 것만이라도 다 쓰고 나오도록 아이 옆에서 지켜주세요"라고. 

세 시간쯤 지난 후에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아이들은 누구라 할 거 없이 나오며 부모를 찾아 품에 안겼고, 부모들 역시 수고했다고 토닥였다.

우리 또한 그랬다. 3시간 시험 치른 아이가 안쓰러워서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바로 나오지 않았다. 울음이 섞여 나올까 봐...

그렇게 시험을 다 치르고 나서 이제 발표일까지 애 태울 시간만...


작가의 이전글 자녀교육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