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생머리와 빨간 입술의 추억
남편이 내게 바라는 이상형은 '처녀귀신'이다.
검고 긴 생머리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새빨간 입술. 그런데 나는 중학교 이후로 늘 머리가 짧았다.
개인적으로 짧은 머리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를 입학하면서 머리가 짧아야 공부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는 엄마의 교육 철학을 따르며 늘 짧은 머리를 고수하고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머리가 긴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 사이에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머리를 감고 말리고 관리하는데 드는 시간이 줄기는 했지만 그렇게 아낀 시간을 공부하는데 썼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6년간의 짧은 머리 생활 끝에 대학에 입학하자 엄마는 더 이상 내 머리길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머리를 기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긴 머리를 한 건 아니었다. 짧은 단발에서 중단발을 오갔다. 긴 머리를 해 본 시간이 많지 않아서 조금만 길어지면 성가시고 귀찮다고 느꼈고 어깨 기장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자르게 되어 생긴 일이었다. 그렇게 긴 머리에 대한 로망과 귀차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간이 지나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었다.
첫 직장은 화장품회사 연구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색상의 화장품이 넘쳐나는 연구실에서 일했지만, 내가 실제로 좋아하는 색은 빨간 장미를 연상시키는 레드나 코랄 핑크뿐이었다. 은행원들이 지폐를 보면서 무덤덤한 것처럼 나도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형형색색 다양한 립스틱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내 입술을 물들이는 색은 늘 정해져 있었다.
3년간의 연구원 생활과 대학원 과정 후 직장을 옮겼고 머리는 더 길어졌다. 드디어 긴 생머리에 입술을 붉게 물들인 여인이 되었을 때 나는 남편을 처음 만났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그는 당시 장교로 군에 복무 중이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남편의 첫인상은 검고 긴 생머리에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빨간 여성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결혼했고, 첫 아이를 낳으며 풍성한 머리숱과 이별한 나는 일과 육아를 잘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긴 머리를 다시 짧게 잘랐다. 그 이후 나의 머리카락은 다시 커트, 단발을 오가면서도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길이를 다시 가져보지는 못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종종 투덜거렸다. 내가 머리를 기르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붉은색의 립스틱을 자주 바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느 날 기분이 내켜서 또는 그럴만한 모임이 있어서 붉은 립스틱을 바르면 남편은 매우 흡족하게 웃었다. 여기서 말하는 붉은 립스틱은 정말 싱그러운 빨강을 말한다. 사실 90년대, 2000년대 초까지는 짙은 메이크업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옛날 사진 속 여성들은 대부분 그런 화장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메이크업도 시간에 따른 유행이 있으니 요즘은 그렇게 진한 색보다는 자연스러운, 즉 한 듯 안 한듯한 화장법이 유행임에도 남편은 내 입술이 빨간 게 좋은가 보다.
빈혈이 심해서 유난히 얼굴이 창백했던 내가 긴 생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면 흡사 처녀귀신과 비슷했다. 그리고 남편은 아마도 그 시절의 우리가, 그 시절의 젊음이 아직 그리운가 보다.
이제 더 이상 남편은 내게 머리를 기르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빨간 립스틱은 종종 요구한다. 대신 남편은 이제 딸아이의 머리 길이에 관심이 많다. 딸아이가 긴 머리를 짧게 자르던 날, 나와 딸은 새로운 머리 스타일에 너무 개운한 마음이었는데 남편 혼자 너무 아쉬워했다.
모든 남자의 로망이 같지는 않다. 각자 자신의 이상형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나는 '처녀귀신'을 사랑한 남자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의 젊은 날의 로망 속 주인공이었던 내가, 오늘도 빨간 립스틱을 꺼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