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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슈 Jan 14. 2022

나 빼고 잘나가는 여자들

나도 대단한 걸 해내고 싶어

몇년 전 어느 날 TV 채널을 하염없이 넘기다 멈칫 리모콘을 내려놓았다. 한 채널에서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친구가 나오고 있었다. 잘 기억 안나지만 무슨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대단한 청년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다. 대학졸업 후 같이 상경하면서 정말 친하게 지냈지만 이후 어떠한 사건으로인해 약 4년 동안 서로 연락을 끊었고 서로의 소식을 몰랐다. 연락이 끊기기 전 나에게 이러 이러한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하고싶다고 어렴풋이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근데 그 친구는 정말 그때 한 말 그대로 대단한 사업을 이끄는 대표가 되어있었다. 나는 오랜 친구를 마치 직접 만난 것 마냥 흥분해 카메라로 티비 화면을 연신 찍었다. 그리고 엄마와 통화했다.

“엄마 A가 티비에 나와! 엄청 대단한 일을 하네? 막 사회에 이런 기여도 하고 저런 기여도 하고 진짜 대단하다! 진짜 소름돋았다니까!”

신기하기도하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단한 사업을 하고 있어서 마치 현재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양 자랑해댔다. 

“우와 대단하네~ 근데 너도 대단하지~”

“내가 뭘?”

“너도 애기를 둘이나 낳고 엄청 열심히 키우고 있잖아!”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엄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사실 내 상황에 대한 비교를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같은 대학을 나와서 같이 여행가고 같이 맥주도 먹고, 어떨 때는 백수처럼 피시방가서 카트하고 그랬던 친구와 내가 이리도 다른 모양으로 삶을 꾸리고 있다는 게 솔직히 씁쓸했다. 그런 씁쓸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오히려 대단하다 대단하다 나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정말 대단하기 때문에 이건 내가 질투하지도 배아파하지도 못하는 지경이다! 그러니 그냥 대단한 친구가 있었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자!’ 하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방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엄마는 그 마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날 위로해주었다. 


최근에는 대학시절 1학년때부터 매우 친했던 친구가 세계 유명 과학 학술지에 이름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누구는 들어가기 어렵다는 공기업에 입사했고 누구는 오랜 꿈이었던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그랬다. 내 주변 여자들은 나 빼고 다 잘나가고 있었다. 


나는 스물 일곱에 남들보다 빠르게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를 가졌다. 또 운좋게 웹드라마 연출, 작가 일이 연달아 들어와 바쁘게 임신기간을 지냈다. 첫째를 낳고도 바로 일을 해야해서 지방에서 올라오신 친정엄마에게 갓난아기를 맡기고는 새벽까지 촬영을 다녔었다. 곧이어 또 다른 작업이 계속 들어와 나는 갓 돌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어린이집을 다녀와서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근처에 거주하시는 시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남한테 피해끼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내 성향은 점점 나를 옥죄었다. 아이와 아이를 봐주는 시어머니 또 친정엄마에게 죄책감이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두 분다 흔쾌히 내가 일하는 것에 찬성하셨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이를 보면서 무릎이 나가고 잔병치레를 하는 등 되려 병원신세만 지는 꼴이 되었다.)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벌리고 다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늘 죄송한 마음으로 아이를 맡겼다.  

남편은 내가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지지해주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주된 양육자로서 아이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일이 들쑥날쑥한 프리랜서 아내를 위해서 일을 그만두거나 휴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렇게 반복되는 죄책감과 함께 육아와 일을 병행했다. 그러다 일이 없는 기간이 조금 길어지자 빨리 나의 가정계획을 완수해야한다는 조급함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편하게 일하러 다니려면 아이는 둘을 빨리 낳아서 함께 키워야지.” 결혼 전부터 늘 하던 생각이었다. 그렇게 바로 연년생(19개월차이) 둘째를 가졌다. 그렇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징징대며 변명하고 싶지않다.)

오마이갓. 그렇게 둘째를 낳고 나서는 정말로 지옥아닌 지옥이 펼쳐졌다. 나는 불안정한 프리랜서로서 일감을 잃을까싶어 들어오는대로 일했다. 꾸역꾸역 일을하며 둘째가 돌이 되었고 어린이집을 보냈다. 그러다 하반기에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 계약직 제안이 들어와 재택근무 풀타임 조건으로 6개월 일을 하게 되었다. 재택근무로 간단한 강의 편집이라고만 알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할줄 모르는 촬영을 직접 하게 되었고 능숙하지 않은 편집 디자인까지 모든 것을 맨땅에 해딩하듯이 하면서 일주일에 3-4개의 영상을 완성해야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서 하는 일이었지만 회사 출근을 하지 않는 것 뿐 오히려 더 최악이었다.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집안일을 안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전업주부처럼 집안일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며 하루 8시간 풀타임으로 일하고 일이 끝나면 곧바로 아이들을 받아서 밤 11시까지 아이들을 재운 뒤 야근을 하며 할당량을 채웠다. 이 기간에는 남편과도 엄청나게 많이 싸우며 집안일의 분배에 대해 투쟁했다. 밖에서 일하고 온 남편으로써는 재택근무가 소위 꿀빠는 일(?) 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긴긴 싸움 끝에 남편은 내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이해했고 퇴근 후에도 더 많은 집안일과 아이들 육아를 담당했다. 

결국 나는 GG를 외쳤다. 계약 기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내 몸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냉동음식을 데워먹이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계약직을 그만두고 웹드라마 일도 받지 않았다. 내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도 육아도 일도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들다고 엄마한테 남편한테 징징대기만하고, 나는 도대체 뭘까. 뭘 이루려고 한 걸까..


“너네 언니 봐라, 공부 아무리 잘해도 다 소용없다. 그저 기술만 배우면 되는기라.”

7년전 사촌 결혼식에서 고모가 내 동생에게 한 말이었다. 고모는 웃으면서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내가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 내 가슴에 박혀있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소위 전교권에서 놀았던 내가 돌연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6년을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는 대학원에 낙방하면서 영화를 포기했다. 그래놓고는 막상 나조차도 즐겨 보지 않는 웹드라마 일을 놓지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웹드라마 일만으로도 벅찬데 굳이 욕심을 부려 해본 적도 없는 강의 제작 일을 수락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그저 돈을 벌고 싶었다. 공부만 더럽게 오래 하고 직장생활 한 번 안해봐서 돈같은 돈은 벌어보질 못했던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도 ‘가치’가 있다고, 내가 이때까지 공부한 것이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서 헛된 일이 된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뭘 하든 늘 믿어준 부모님에게, 일찍부터 직딩이었던 친구들에게, 내 공부가 헛된 것이라 큰 소리로 말하던 고모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비록 영화 감독은 못 되었지만 무언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돈도 벌고 있다고, 그래서 내 인생은 아직 망한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

나는 아이도 잘 키우고 싶었고 돈도 벌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게 애쓰며 사니 당연히 불행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 인생 마지막까지 대단하다고 누구나 인정할만한 작품 하나정도는 만들어내야 쪽팔리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그게 나에겐 아무 쓸모없는 인정욕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따금 부모님에게 크게 용돈을 한 번씩 드리면 이때까지 나에게 투자된 당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집 계약금이나 시부모님 수술비용으로 큰 목돈을 한 번씩 남편에게 보조해주면서 나도 동등하게 가계생활을 이끌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결코 나의 비전을 위한 생산활동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의 주된 양육자로서 집에 오랜시간 머물러 있다가 외부로 촬영을 나가거나 내 능력을 발휘해 미팅에 참여하고 PD, 배우들과 소통할 때면 왠지 활력이 생기고 자존감이 살짝 올라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작업도 마지막엔 내것으로 남지 못했다. 그저 나에게도 돈 벌이였기에 나의 쓰임을 다하면 애정이 사라지는 작업들이었다. 


남들은 나를 보며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고 놀란다. 요즘 같은 저출산시대에 애를 두명 낳는 것은 대단한 일이 맞을지도 모른다. 많이 바뀌고 있긴해도 아직 갈길이 먼 한국 사회 시스템상 어쩔수 없이 부모 중 한 명은 희생해 아이들의 주양육자로서 시간과 정성과 잠을 헌납해야하는데, 부모 둘다 오랜시간 커리어를 쌓거나 공부를 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누구라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여자가 주양육자로서 희생되어진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나의 경우는 남편이 오랜 시간 한 회사의 과장으로서 경력을 쌓아 가정의 안정적인 수입을 책임지고 있으며 내가 커리어없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둘 낳아 원만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목표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급하게 달렸다. 그 결과 내 이상에 걸맞는 가정을 꾸리는 것과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증명 욕구가 혼재해 나는 결국 성격파탄자가 되어버렸다. (남편이 덤덤하고 쿨하던 내가 많이 변했다고 앓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남편, 그건 당신 책임도 있어.) 결국 아이들에게 나는 무서운 엄마, 바쁜 엄마가 되었고(그 결과 첫째는 일찍이 엄마인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다.) 집안일도 늘지 않아 청소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결혼 생활 4년 동안 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작품을 내세우지 못했을 뿐더러 나보다 잘나가는 주위 친구들에게 ‘아이를 둘이나 키우다니 대단해.’라는 칭찬밖에 들을 수 없어 자괴감이 들었다.(물론 아이 둘을 키우는 일은 멋진 일이다. 나는 대단하게까지는 수행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육아는 매일이 승진시험 같다. 매일 나의 인간성을 돌아보며 과연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연 나는 괴물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한다.)


"너무 애쓰지마라. 뭐 대단한 거 안 해도 괘안타."


엄마의 말에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그랬다. 어느 누구도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또 유명한 예능에 나오는 인간승리의 아이콘들처럼 나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서..’ 줄줄이 내가 선택한 것들이기에 내가 이를 악물고 욕심부려 달려야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 없이 자기 증명에 급급하게 달리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오지 않을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결승선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방향이 잘못된 채 달리기만 하면 끝끝내 결승선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성공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엄마의 말처럼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나의 존재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로했다. 집에만 있다고 해서 나의 자리가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니였다. 가정이 원활하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집안일을 잘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매일 월급도 직급도, 심지어 소통하는 동료도 하나 없이 입을 꾹 다문채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게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그리고 사회로부터 얻는 수입이 없다고 해서 내가 공부한 것들이 헛된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이 배웠기 때문에 내 아이들에게 난 해줄 이야기가 많고 전해줄 영감이 많다.(아이들을 대단한 결과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 집에만 있지는 않을 계획이다.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사회에 나가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금은 그 노력과 함께 내가 선택한 육아에 대한 책임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순조롭고 내 모든 상황이 복에 넘치게 안정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더 이상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가지지 못한 커리어를 초라하게 생각하는 비교를 멈추었다.(sns어플을 다 삭제하는 것을 추천한다.) 


누구보다 나아서가 아닌, 오로지 내 가까이에 살아 숨쉬는 행복에 집중하며 순간을 살아야 한다. 나의 가정을 지키며 평온하게 내가 하고싶은 일에 대해 고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한다. 나는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멋지게 나로 살고 있다. 


(..어린시절 나에게 누군가 "무언가 되지않아도 좋다."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언제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무언가 되지 않아도 좋다. 너 자신으로 살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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