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물리치료사의 평범하고 적당한 하루
내 직업은 물리치료사.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데, 시간여행을 와도 곧장 되돌아 가버린다는 2020년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13년 정도 되었다. 내 위로도 2만 명이 훌쩍 넘는 선배들이 계시지만 이제 오프라인 보수교육에 가면 내 면허번호는 앞쪽에서 찾아야 한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일이 좀 손에 익었다 싶었을 때 내게도 춘기 씨가 찾아왔다. 직장인 사춘기는 혹독했다. 나는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많은 편인 데다가, 이 일은 오래 하지 못 할 테니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방황에 아주 좋은 재료가 돼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석사 졸업장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지금 날 먹여 살리고 있는 건 처음 시작한 이 일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물리치료사는 물리치료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한 다음, 보건복지부에서 물리치료사 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합법적으로 일 할 수 있다. 면허증은 정식 허가증이지만 전문가라는 인정은 아니다. 그럼 10년 넘게 일해 온 나는 과연 전문가일까?
물리치료의 영역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하다. 나는 내가 몸 담아온 분야에서만, 그것도 내가 치료해온 질병과 환자의 유형에 한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제가 치료해본 경험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쩐지 “내가 전문가다”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한 분야에서 10년 넘게 일했지만 글쎄.. 겸손의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직장에서는 베테랑의 가면을 쓰고 일하지만 사실 환자를 치료하고 보살피는 것도, 치료실을 운영하는 것도, 팀원들을 대하는 것도 모두 자신 있지는 않다.
자신감이란 뭘까.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걸까. 주위를 둘러보면 거침없이 큰 보폭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춤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조심스럽다. 언젠가 한 번은 그야말로 자신 있게 걸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걸어간다. 그래도 등에 짊어진 짐은 어떻게든 내 힘으로 지고 가려고 하니 그건 다행이라 여기면서.
어쨌든 나는 간혹 멋있는 구석도 있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 답답한 편이다.
그런 내가, 타고나길 쫄보에 그릇이 작고 진취적인 태도 같은 건 털어봐야 한 톨도 안 나오는 내가 어느 날 치료실의 실장이 되어버렸다.
규모가 큰 기업이나 조직은 사람이 많은 만큼 직급체계도 세분화되어 있지만 치료실은 대학병원이나 공무원 같은 조직이 아니면 간소하다. 다해도 일반 치료사, 선임 or 주임 치료사, 팀장, 실장 정도랄까.
나 같은 사람은 말년 평사원이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데. 직급을 달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새로 직장을 구하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이제 내 연차에 평사원인 사람은 없었다. 절대 실장 같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관리자급이 아니면 백수 둘 중에 하나였다.
김 대리가 김 과장이 되고 김 부장이 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승진을 위해 물밑작업도 한다는데. 월급이 많아지고 조직에서 힘이 생기는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은 승진을 바란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난 정말이지 실장이 되기 싫었다. 관리자가 되면 돈과 힘을 얻는 만큼 책임감이 생기고, 능력을 펼쳐 보여야 한다. 그뿐인가. 사람들을 아우르고 이끌어야 한다. 그동안 모셨던 실장님들에게 요구된 다양한 능력들과 그들을 둘러싼 많은 입들이 쏟아낸 불평불만을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만 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난 못해, 무서워.
나는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게 정말 무서웠다. 책임진다는 건 생각보다 밀도가 높은, 아주 묵직한 일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그런 부담감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면서 멋지게 성장하겠지만 나는 그저 현실의 쫄보일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못해, 자신 없다는 핑계 뒤에 숨어 어른다운 행동이나 책임 같은 건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그렇게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두려운 건 피해 가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끝내 발을 떼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많은 실패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그중 하나가 스스로에게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나에게서 기회를 앗아갈 자격이 없다는 걸 기억했다. 설사 실패해서 후회를 하거나 그때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안도를 하더라도 그건 지금의 내 몫이 아니다. 거기에 밥벌이에 대한 다급함, 비겁함을 꾸짖는 양심, 그래도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자존심도 내 등을 떠밀었다.
많이 망설였지만 나는 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여기저기에서 용기를 끌어 모아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으로 실장이 되었다. 날 채용하신 원장님은 치료실을 맡길 만큼 든든한 사람을 원하셨을 텐데 이런 사람이라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다.
실장이 되자 회의를 하고, 팀원들에게 어떤 톤으로 말해야 좋을지 궁리하고,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대책을 세워 보고를 해야 하는 어렵고 낯선 세상이 펼쳐졌다. 어른의 세상이다. 내가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바들바들하면서도 한편으론 내 몫은 해내고 싶어 자꾸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혼돈과 아득함이 공존하는 기분으로 퇴근하길 몇 달째. 지금도 누군가 “실장님~” 하고 날 부르면 움찔하는데 그런 내가 조금 웃기기도 한다. 초보 실장으로서 울고 싶은 기분을 더 자주 느끼지만 그냥 하루하루 부딪히고 어설프게 해내며 지내고 있다.
너무 빨리, 섣부르게 도망치지 않도록 용기를 자급자족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