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하기 위해 한 번 , 바지를 질질 끌며 걷는 환자의 바짓단을 걷어주기 위해 두 번, 휠체어에 앉아 나를 부르는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세 번 까지는 세었는데 누가 뭘 물어보는 바람에 세는 걸 잊어버렸다. 그리곤 그래, 그런 거 세서 뭐하겠어하고 말았던 것 같다.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분필을 사용했기 때문에 칠판에 서판을 하는 선생님들은 호흡기가 안 좋다는 말이 있었다. 직업병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물리치료사는 대체적으로 관절 한 두 군데는 말썽인 직업이다. 치료 장비나 기기를 사용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몸에 무리가 덜 가도록 자세에 신경 쓰는 편이지만 그동안 쌓인 마일리지가 있어서인지 퇴근할 때 종종 무릎이 얼얼하거나 시리다. 때로는 허리가 말썽일 때도 있고.
예전에 본인의 건강을 소중히 여기며 마비 양상이 심하거나 체구가 큰 환자를 꺼리던 동료가 있었다. 그 선생님은 이 일을 함으로써 허리와 어깨에 무리가 가는 것에 정말 애달파하는 듯 보였다. 그때 난 솔직히 좀 유난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몸은 소중한 것. 특히 연차가 쌓이면서 몸이 예전같이 않다는 걸 느끼면서부터는 내 몸에 무리가 덜 가도록 그리고 그로 인해 환자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요령을 익혔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몸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들이 스스로의 몸을 갈아서 일하기보다는 건강을 지키면서 환자에게도 충실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기를 바란다.
예전에 피렌체의 두오모를 보고 할 말을 잃을 만큼 감명받았던 적이 있다. 어여쁜 공주가 건물로 환생한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또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는 마음이 얼마나 따듯해지던지.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인해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면서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선망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면서 자기의 존재를 증거 했다는 게 멋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내 머쓱해져 그런 마음은 한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내가 세상에 생채기 같은 흔적이라도 남기는 걸 끈질기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어딘가로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무릎이 자꾸 욱신거렸다. 고질병이라 속엣말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순간 아, 이게 내 역사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욱신거리는 무릎이 내가 살아온 역사고, 세상에 태어나 열심히 해왔다고 증명해주는 증거구나 하는 생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같은 환호까지는 아니어도, 지나쳐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 색으로 물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무언가를 일구어내며 살아왔다는 성취감이 새삼 느껴졌다. 내가 나 자신을 한 사회인, 직업인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흔적은 건물이나 책, 영화처럼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그 성실했던 시간이 내 몸에 새겨져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하필이면 욱신거리는 무릎이라니.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이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은 있다.
나는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때로는 내 이익을 위해 약게 굴기도 하고 비겁해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최대한 일의 본질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물리치료사로서의 내 일의 본질은 스스로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름진 입가에 침을 흘리고, 손으로 변을 뭉개 종종 갈색으로 물들어 있는 그들을 경시하지 않고, 그들이 받아야 할 의료서비스를 적절한 방식으로 충실히 제공하는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비참할 수 있지만 동정받을 일이 아니다.안타까운 것은 몸이 아픈 현재의 상황이지 그들의 인생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환자들에게 상냥하다. 우울해하는 환자에게는 장난스레 말을 걸어 웃게 하고, 자신의 신체기능에 자신이 없어하는 분에겐 잘하셨다고 쉴 새 없이 격려한다. 집에서의 나는 무덤덤한 편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좀 가식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한정적인 곳에서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일상을 보내는 환자들에게는 적절한 자극과 활력이 필요하기에 나는 영혼을 끌어모아 텐션을 올린다.
환자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나이가 들어 아이가 돼버린 환자들에게 친근함의 표현으로 반말을 쓰는 치료사도 있지만 난 아니다. 만약 이 환자를 사회에서 만났다면 당연히 존댓말을 사용했을 텐데 환자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같아서 반말을? 안 될 말이다. 그리고 실은 내가 병들어 입원했을 때 새파랗게 젊은 치료사가 반말을 한다면아마 기분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백프로예상되기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보고, 다정하게 말한다. 물론 여기에도 가식이 섞여있다. 타고나길 무뚝뚝한 나의 다정함은 훈련된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내가 아파 병상에 누워있다면 진짜인 무뚝뚝함보다는 가식적인 상냥함이 더 좋을 것 같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다정함도 연습하다 보니 몸에 배어서 일부는 진짜가 되었다.
환자들에게 상냥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다정하게 말할 때 나는 나를 인정한다. 오늘 하루의 삶에서 그런 인정 거리들을 발견했을 때 나 자신이 기특하고 퇴근길이 뿌듯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은 두오모를 지은 사람도, 그 어떤 작가나 유명인사도 부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