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광화문을 좋아한다.
교보문고가 있어서, 좋아하는 펠트 커피가 있어서, 널찍한 대로 끝에 청와대와 경복궁이 한눈에 담겨서 좋다. 조금만 내려가면 서울시청과 덕수궁, 정동길도 있는데 그 일대가 주는 묘한 안정감도 좋다. 그리고 그 이유들의 가운데 친구 P양이 있다.
그녀와 나는 대학 친구이다. 우리 과는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 당시 P와 나는 함께 어울리는 무리 안에서 친하게 지냈지만 같은 방을 써본 적은 없었고, 뭐랄까.. 넌 내 베프야! 하고 도장 찍은 사이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졸업 후에도 쭉 친구들과 함께 만나면서 여전히 돈독했지만, 적어도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지는 않았었다. 지금의 나는 P바라기인데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십 년 전쯤인가. 카톡 프로필에 제주도 여행을 가고 싶다고 썼는데 그걸 본 P가 본인도 가고 싶다며 연락을 주었고, 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우린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됐다. 다른 친구들 없이 둘이 갔던 첫 번째 여행이었을 거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면 100% 싸운다는 고전도 생각 안 날만큼 들떴었다. 그리고 그만큼 너무 즐거운 여행이었다.
지난 내 삶은 그렇게 화사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기로도 있었고,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아득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본래 타고나길 피곤한 구석이 있는지라 이십 대는 여러 고민과 불안들을 다독이려 애쓰며 보냈다. 다소 칙칙했던 젊은 날에 P와 함께 하면서 색이 입혀졌다면 과도한 감상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나의 투쟁에 함께 하며 힘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들이 있지만, 친구라는 존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동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다른 길목에 있는 친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서로를 비춰줄 수 있는 사이. 우리도 그랬다.
많은 부분에서 경직되고 긴장도가 높았던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자유로웠다.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웃을 줄 알았다. 그녀의 사고는 바람처럼 자유로웠지만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착했다. 여려 보이지만 단단한 사람.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내게 Why not?이라는 질문을 던져주었고, 그 질문은 내가 단단히 두른 갑옷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P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복잡했던 머리가 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린 둘 다 걷는 걸 좋아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많이 먹는데 P는 양이 적어서 그것도 잘 맞았다. 서로 시간이 되는 주말이면 만나서 광화문을 비롯해 서울 곳곳을 누볐고, 커피를 마시며 얘기하고, 또 걷고,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 누구 한 명이 여행 가고 싶다, 하면 주말에 연차를 붙여서 순천, 여수, 안동, 제주도 등 1박 2일로 짧게 여행을 갔다. 그렇게 짬짬이 갔던 여행으로 숨이 트였고, 그 힘으로 일상을 잘 버텨냈었다.
내 친구 P에게 고마운 것이 참 많다. 오랫동안 스스로 갉아먹었던 속을 내보였을 때 아무렇지 않게 품어줬고, 만날 때마다 토로했던 온갖 고민에 귀 기울이며 다독여주었으며, 나의 지루하고도 치열한 투쟁을 항상 응원해주었다.
내가 나 다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 내 친구가 곧 결혼한다. 그리고 멀리 이사를 간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결혼과 이사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P와 사이가 멀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짐작은 했지만 아직 멀었다며 제쳐두고 있었는데 헤어짐은 성큼 다가왔고, 애써 무시했던 슬픔과 두려움이 내 어깨를 감쌌다. 이제 나는 누구랑 커피 마시고 산책하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근심에 휩싸였다. 사랑하는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도 정말 컸지만 우리의 관계가 변해서 그녀를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면서 한동안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기쁜 소식에 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내가 참 별로였지만, 마음을 계속 가다듬었다. "이건 슬픈 일이 아니야, 내 친구가 행복해지는 일이지" 하고.
익숙한 관계가 변하는 것에 상실감을 느낀긴 했지만 이건 내 친구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녀가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만큼 P가 내게 중요한 존재라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P는 자신의 결혼 소식에 휘청이는 날 짐작했는지,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하게 된 내게 응원 선물과 함께 편지를 써 주었다. 편지 안에는 내가 P에게 정말 좋은 친구이고 큰 힘이 돼주었다는,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 마음이 적혀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아쉬움은 그녀에게 받았던 좋은 것들을 나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이다. 내가 P에게 의지하고, 힘을 얻었던 것처럼 나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에.
과연 P는 날 조련할 줄 알았다. 그 편지 덕분에 난 멀리 전학 가는 친구에게 섭섭해하는 초등학생 6학년 여자아이의 마음에서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성인 여자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내 친구 P.
결혼 축하해! 온 마음으로 말하는거야.
삶의 반경이 달라지고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 그냥 때가 되었을 뿐인 거지.
네 덕분에 나도 좀 큰 것 같아.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보고 싶을 때 타이밍이 맞으면 즐겁게 만나자.
음.. 그래도 너랑 마주 앉아 떠들고 울고 웃었던 모든 순간이 정말 그리울 거야.
너에게 받은 좋은 것들이 너무 많다. 네가 함께해준 모든 것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넌 내 삶의 한 축이었고, 여전히 내 일부야. 그리고 잊지 마. 네게 어떤 변화가 있던지 언제나 태양은 너라는 걸.
추워지기전에 놀러 갈게. 테라로사 가서 커피 마시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