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바닐라 라테를 먹을 거라고 다짐했다. 아빠의 점심을 챙겨주고 난 뒤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좋아하는 초밥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일인당 1만 원 하는 런치세트를 먹었는데 일전에 비싼 초밥을 먹은 뒤로는 감흥이 별로 없다는 사치스런 얘기를 하며 가게를 나왔다. 그리곤 카페에 가서 나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엄마는 카페모카를 시켰다.
이 카페를 단골집으로 삼을까 했더니, 엄마는 커피는 맛있는데 뷰가 별로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종사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병원에서 일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대화가 통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환자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옛날에 엄마가 막내 동생을 낳다가 고생한 얘기까지 흘러갔다. 출산 후 하혈을 너무 심하게 해서 피를 16 파인트나 수혈받았다는 우리집 단골 레파토리다. 엄마는 자신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셈이라는 말로 마무리 되는.
막내는 제헌절에 태어났는데,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쉬는 공휴일이었다. 엄마는 오후 3시쯤 출산을 한 후,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왕십리에 있는 한양대 병원으로 응급 이송됐다고 한다.
응급상황이었던 엄마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아빠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 아빠가 어떤 심경이었는지 말한 적은 없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 아빠와 같이 근무하던 어떤 분이 말하기를, 아빠가 그날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울었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했더랬다.
맥박이 안 잡힐 정도로 심각했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닫힌 문 밖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렸던 아빠 심정은어땠을까.
아마 무섭고 막막했겠지. 30대 초반의 남자가 4살, 3살 연년생 딸내미와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아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센 척하는 아빠라도 무서웠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평소 고집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지던 아빠가 조금은 친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막내를 낳을 때 그렇게 수혈도 많이 받고 고생을 하는 바람에 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겨서 쇼그렌 증후군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한다면서도 조금도 한탄스럽거나 불평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엄마의 이런 점이 존경스럽다. 엄마는 좀처럼 인생에게 불평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나를 낳을 때는 새벽에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더니 직원이 셔터를 바닥에서 1m 정도만 올린 채 그 사이로 들어오라고 해서 화가 치솟은 아빠가 욕을 했더니 그제야 문을 열어주었단다. 그 시간에 의사가 없어서 산파가 출산을 진행했고, 회음부 절개를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항생제를 복용했더니 젖이 안 나와서 아빠가 고무장갑을 끼고 오래도록 마사지 한 끝에 초유만 겨우 먹였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출생의 비화가 있었어! 하면서 어쩐지 좀 마음이 들뜨면서 내가 먹은 초유에 아빠의 정성이 들어갔다는 것이, 아빠가 나를 위해 뭔가 정성스러웠던 때가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좀 감동스러웠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고 집에 돌아와 ‘스틸 앨리스’란 영화를 봤다. 저명한 언어학 교수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과정을 그린 내용인데 엄마와 나, 둘 다 마음이 먹먹해져 버렸다.
올해로 예순두 살이 된 엄마는 남은 인생을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게 잘 살아야 될 텐데.. 나지막이 말하면서, 그러니까 하루하루 충실히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의 단골 멘트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엄마가 인생의 후반을, 죽음을 준비하는 나이가 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내가 왜 시간이 날 때마다 되도록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온몸과 마음에 엄마가 흠뻑 스며드길 바랐던게 아닐까.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보고 싶을 때마다 함께 한 추억으로 달래 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