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질문이 항상 많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어렸을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언제부터 그랬는 지를 모르겠다. 아마도 학교 다닐 때는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선생님들이 많았어서, 감히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속으로 삭히고 있었을 것이다. 감히 수업의 정적을 깰 수 없어서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신문기사에서 내가 다녔던 중학교 세계사 선생님의 인터뷰가 실린 경우가 있었는 데, 나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왜냐고? 실제와 너무 다른 선생님으로 포장되어 있어서이다. 세계사 시간을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한껏 기대를 했으나, 선생님의 수업은 대실망이었다. 무성의한 세계사 수업에 대한 당시의 기억은 내게 세계사는 그저 암기과목으로 남게 되는 결국 나에게 온전한 손해의 시간으로 남았다. 그걸 수업이라고 하나? 왜 그렇게 쓸데 없는 말은 많이 하면서, 거기다가 당뇨가 있으셔서 그런지 항상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성장이 조금 빨랐던 여자애들 신체를 가끔 건드리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큰 일날 일들이 그때는 먹혔던 시절. 그래도 매를 맞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생각해보니 가볍게 맞기는 했다.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는 중학교 여자애들을 배려하는 체벌. 그냥 모든 것이 그러려니 했던 시절, 아마도 질문을 속으로 삼키고 있지 않았을까?

질문도 뭘 알아야 하지, 너무 맹탕이면 질문거리가 없다. 시험도 단편적인 것들을 그저 외워서 내는 정도이니, 세계사를 왜 배워야 하는 지에 대한 설명도 본인이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에 대한 계획도 없이 그저 시간을 떼우는 그런 수업, 지금은 사학연금으로 편안한 은퇴생활을 누리고 계시려나? 내가 신문에서 그 기사만 보지 않았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가끔 보는 유튜버는 자신의 채널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유과 명분없이 야구방망이로 맞았던 것이 너무 분했던지, 자신이 나온 학교와 그 선생님의 이름을 말하며 ‘지금 잘 살고 계시냐?’를 감정을 가득 담아 가끔 언급한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저럴까? 지금의 교권추락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성의라곤 1도 없었던 그 시절의 그 세계사 시간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전혀주지 않았다. 세계에 대한 관심에 목이 말랐던가보다. 질문이 움츠려들거나 없게 만드는 수업들. 비단 세계사 수업 뿐이었겠는가?
나는 모든 수업이나 강의에서 모르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한다. 망설여질 때도 있지만, 질문하는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는 것이다. 누구는 눈치를 주기도 하나, 요즘엔 질문하는 나를 열의를 가진 태도라고 평가해주기도 한다. 질문이 너무 개인적인 것만아니면 되도록 끝나고 따로 질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 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하는 질문은 함께 공유한 시간 가운데서 나온 것이고, 그 질문이 함께 강의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의견이나 반응을 가지는 지가 궁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의를 통한 질문이 수업시간내에서 소화되기를 바라는 맘에서이다.
교수자가 주옥같은 답을 한다면 나혼자 들어서는 안되고, 설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교수자와 모든 구성원이 함께 있을 때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보같이 여겨지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나만 모르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게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재즈에 관한 두툼한 책을 쓴 작가의 출판기념회와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재즈에 관심이 많은 지인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가게 되었다. 평소 관심 분야였지만, 재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재즈카페에서 이루어진 그 출판기념회는 고급스런 분위기에 평소 작가의 팬들과 우연히 재즈카페에 들른 사람등등이 참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터뷰 형식의 저자와의 대담으로 이루어 졌는 데, 차분한 분위기에 어두운 조명과 와인과 함께 째즈음악에 대한 책 출판회 다왔다. 저자는 설명을 하면서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또는 아시다시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썼는 데, 내가 보기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특히 나처럼 우연히 또는 재즈가 알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많이 있어 보였다. 물론 내 예상이었으나. 저자분은 재즈음악의 전문가였고, 평소 그의 팬들이 와 있어서 그렇게 표현하시는 듯 했다.
'작가님! 작가님 생각만큼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해요!'
작가님은 겸손 그 자체였다. 더 멋지게 자신을 포장해도 되는 그런 본인의 출판기념일에서 더 자랑질 해주셔도 됩니다. 난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저는 우연히 친구따라 재즈카페온 사람입니다. 오늘 많은 재즈 이야기를 해주셨는 데, 다양한 재즈의 특성중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은 ’Improvisation’ 즉흥이었다. 남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수 있으나, 나는 대가에게서 큰 선물을 직접 내귀로 들은 날이다.
강의를 듣다보면 처음 질문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첫 질문과 그에 따른 강연자의 대답이나 반응을 보고, 이후로 강의자체가 인터렉티브하게 되거나, 질문이 더 편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편하게 질문하기 위해서, 첫 질문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다른 분들도 질문도 듣고, 다른 사람은 어떤 것이 궁금한 것인가를 듣기도 하고, 그에 대한 강연자의 대답도 어떻게 질문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 강연이나 강의가 토론장은 아니지만, 이런 과정들이 벌어지는 광경을 즐긴다.
아마도 이런 나의 습관은 스페인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질문하는 것을 보면서, 얻어진 듯 한 데. 스페인이나 유럽애들이 내가 보기엔 너무 바보같은 질문도 스스럼없이 하며 소통하는 것이었다. 저런 질문하면 좀 창피하지 않나? 하는 그런 것들도 당당하게 하니, 나에겐 이것은 전체 시간낭비가 아닌가 하는 경우도 생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했을 때, 그 좋은 기회를 아무도 살리지 않았던 안타까움을 모두가 보지 않았는가 말이다. 큰 사람앞에서 질문을 하려면 평소에도 질문을 하는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하고, 무엇이 궁금한 지를 계속 탐험해야 한다. 생각보다 연습되어져야 것들이 많다. 질문하는 태도, 말의 속도와 핵심을 요약하기 및 자신감등..
나도 교수자이자 강연자가 될 때도 많다. 대부분은 호기심에 기반한 나도 궁금했던 그런 질문이다. 그러나, 예의없게 질문하면 예의 있게 대답해주기는 힘들다. 본인이 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면 그에 맞는 대답이 아닐 경우 표정이 변하는 질문자를 보면 더 해줄 대답도 없다. 대답이 짧게 끝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어서 다른 시간으로 넘겨야 하는 질문은 모두를 위해서 장기간에 걸쳐서 탐구해야 한다. 단답형질문은 구글링하거나 AI검색하는 시대이니 서로 적극활용하는 게 좋겠다.
요즘엔 챗 쥐피티로 내가 궁금하면 언제든지 묻고 답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기도 하지만,
그동안 나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해주신 분들 잘 모르는 질문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언급해 주신 분들 그리고, 이제는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이므로, 더 잘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격려해주신 교수님, 강의에 답이 모두 들어있어서 더 이상 질문이 필요치 않은 강의등. 질문과 대답 그 모두가 소중한 시대 잘 질문하고 잘 대답해보자. 그 질문이 너무 엉뚱하고 비합리적으로 여겨질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