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미라보 다리 아래서 센 강은 흐르고.....
시인과 화가의 사랑을 생각하다.
파리가 사랑스러운 서른세 가지 이유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도시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는 저 센강을 말할 수 있겠다. 황혼 녘 센 강가에 앉아 노트르담 종소리를 듣던 그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파리의 센 강에는 서른여섯 개의 다리가 있다. 1578년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퐁뇌프부터 1900년대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세워진 알렉산드로 3세 다리, 루브르와 오르세를 연결해 주는 긴요하고 매력적인 퐁 데 자르 (예술의 다리)까지... 다리마다 저마다의 색깔과 숱한 이야기들이 켜켜이 새겨 있으리라.
사실 내게는 그 수치적인 기록들보다 오래된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에서 두 남녀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즐기던 퐁 뇌프에서의 불꽃놀이 장면, 내 인생 최애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비 오는 날 밤 알렉산드로 3세 다리 위에 가브리엘과 길의 조우 장면, 세상 수많은 연인들이 주렁주렁 사랑의 흔적을 매달아 놓았던 예술의 다리로 말이다. 그렇게 기억에 낭만을 하나 더 얹고 싶어 진다. 동쪽과 서쪽의 간극을 이어주듯, 평행선을 그으며 전혀 맞닿을 수 없을 거 같은 남과 여를 이어주는 그 매개체로...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리는 단연 [미라보 다리]다. 파리 시내 서쪽 끄트머리 외딴곳에 있고 수많은 연인들의 마음에 짝대기를 그어주는 그 다리.... 19세기 파리에서 활동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로 인해 이 낡은 다리가 파리의 여느 그것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여유있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허비하며 사는 것을 가장좋아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이 시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걷노라면 올리브 그린색의 다리가 군데군데 바래고 녹이 슬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미라보 다리에서 에펠탑을 관망하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시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1907년,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27세의 기욤 아폴리네르는 파블로 피카소의 소개로 마리 로랑생을 처음 만났다. 마리 로랑생은 여성이 활동하기 어려웠던 벨 에포크 시대에 숱한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뛰어난 화가이다. 그녀는 시인의 여자 친구가 되어 연인으로, 예술적 동지로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그녀의 파스텔톤의 자화상을 봤을 때 색감이 주는 황홀감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마리 로랑생 그림 앞에서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19세기 파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핫한 도시였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걸출한 인물들이 불나방처럼 파리로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때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에 둥지를 틀고 서로 친밀한 교류를 하며 예술의 꽃을 피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항상 이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해 왔다. 그래서인지 젊고 아름다운 화가와 유능한 시인의 만남이 내게도 영감을 준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라고 지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며 기욤과 마리는 열정적인 사랑을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원체 소나기 같아서 그 감정이 찰나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그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사랑도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으로 결국 종지부를 찍는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된 이유로 마리는 이 시인에게 결별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시를 쓸 무렵엔 미라보 다리 인근에 살았기에 매일같이 이 다리를 지나쳐 갔을 것이다. 시, [미라보 다리]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화가 마리 로랑생과 이별 후 쓴 시로 유명하다.
젊은 마리 로랑생과 기욤 아폴리네르
오늘은 왠지 미라보 다리 아래가 생각나는 하루다. 사랑도 기억도 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때론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필요하다. 시인의 말처럼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날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도 괜찮다. 이른 봄 새벽 다리 위에 핀 아지랑이처럼, 희미하지만 확실한 마음의 소리를 듣는 날엔 마음의 키가 한 뼘 더 자라난 기분이 든다. 미라보 다리아래서.....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기억해야 하랴
기쁨은 항상 슬픔 뒤에 오던 것을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자
팔을 낀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을 한 물결은
지쳐 흐르는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세월은 간다
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간다
인생은 이리도 더디고 희망은 이리도 벅찬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지나간 세월도 가버린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