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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산책길

[책,책,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입니다

by Sarah Kim
경비원이 지킨 건 그림이 아니라, 삶이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입니다』 를 읽고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을 기억하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 가방은 미술관에서 GET 한 굿즈들로 가득하다. 여러 장의 엽서,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 그림 도록, 미술관 브로셔나 티켓 조각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그림들과 작가,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말이다.


꼭 보고 싶었던 그림을 마주한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을 걸었을 때였다. 그날은 어쩐지 나도 바쁜 발걸음의 관람객보다는 그곳에 상주하는 직원이 되고 싶었다. 피난처같은 그곳에서, 같은 그림들을 시시각각 바라보는 응축된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는 길


그러다 마주쳤다. 패트릭 브링리, 열흘의 여행보다 진한 열 해의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낸 이 사람.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입니다
이 책은 ‘직업이 곧 인생의 은유가 되는 순간’을
아주 섬세하고도 유쾌하게 포착한
한 권의 그림같은 책이다

나는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무전기를 찬 경비원이 아니었다.


내 삶이 부서질 때, 미술은
내게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 한 줄에서 나는 멈춰버렸다. 미술은,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말을 건다. 그림 앞에서, 우리는 모두 잠시 멈춘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책에는 작가가 사랑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며 그는 말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결국 얼굴에
내 안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한 전시실에서 오랜 시간 멈춰 섰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 역시 렘브란트를 마주했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의 눈은 항상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정면을 바라본다. 마치 내 마음의 주름을 먼저 읽은 사람처럼.


그리고 베르메르의 ‘소녀’, 그 고요한 응시의 순간.

브링리는 그녀를


정지된 침묵의 음악

이라 말했다. 나 역시 그 앞에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시정지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마음에 오래 머문 그림은 또 있었다.


피터르 브뤼헐의 <수확하는 사람들(The Harvesters)>

브링리는 이 그림을 “세상 자체를 그린 풍경”이라 불렀다.

풍요로운 밀밭, 나무 그늘 아래서 쉬는 농부들, 그리고 그 너머의 조용한 일상. 그는 이 그림 앞에 서 있을 때면, 현대라는 소란한 시간에서 잠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경비원’이 아니라, 그 풍경 속 그늘 아래 앉은 한 사람처럼.


브링리는 그림앞에 서 있을 때마다, 예술이 말을 걸기보다는 곁에 있어주는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모네 그림 앞에서는 색이 말을 걸고, 바람이 지나가, 하루의 기분을 바꾸는 힘이 있다”라고 했다. 지루한 근무 시간에도, 이 그림 앞에 서면 삶이 다시 ‘움직이는 중’이 된다고….이 얼마나 멋진 말인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그는 매일 같은 복도로 출근했지만, 그림 앞에서 하루하루는 조금씩 다르게 흐른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다. 그림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나의 마음이 매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술’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전시장이 아닌, 살아 있는 감정의 보관소로서 미술관을 보여준다. 브링리는 삶의 절망과 상실 속에서 미술관에 ‘피난’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다시 ‘삶을 지켜내는 법’을 배웠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분수대앞에서


그는 피카소나 고흐 앞에서 철학자가 되고, 지루한 날에는 로댕 앞에서 묵직한 인내를 배운다. 마치 하루키가 러닝을 통해 글을 쓰는 인내를 다졌던 것처럼, 그는 걷고 또 서면서 ‘예술의 시간’을 삶에 스며들게 한다.


삶을 지키는 사람의 눈빛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는 경비원이 아니라, 그림 옆에서 관람객의 감정을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킨 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순간이었다.


언젠가 다시 뉴욕에 간다면, 나는 ‘작품’보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선 너머, 경비원 제복을 입은 한 철학자의 잔잔한 웃음을 떠올릴 것이다. 지난번 런던 미술관에 갔을 때 젊은 경비원이 내게 보이던 호의가 생각난다. 카톡 아이디까지 물어봤었는데^^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예술이 삶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예술이 곁에 있어, 그날을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은 진실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입니다>는 그런 진실을 알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나 역시,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을 잠시 떠도는 또 한 명의 경비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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