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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황금 밀밭을 날아 오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by Sarah Kim
오베르는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형적이고 그림과 같은 시골의
풍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동생 테오에게


오르세와 오랑주리에서 인상주의의 빛을 따라 걸었던 발걸음은 이제 파리의 중심을 떠나 외곽으로 향합니다. 고흐의 말마따나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기 위해 우리도 기차를 타기로 합니다. 기차역 플랫폼에 서면 늘 묘한 긴장이 찾아옵니다. 도시의 심장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선다는 흥분 때문일까요? 좌우지간 대도시에서 벗어나, 여행 중에 또 다른 소도시로의 여정은 아주 신나고 매력 가득한 일입니다.

1877년 모네가 그린 생라자르 기차역(좌)과 생 라자로 역(우)
생 라자르 기착역에서


생 라자르역은 19세기 파리에 기찻길이 생겨나던 그때, 모네를 위시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장소입니다. 도시의 근대화가 활발해 지던 때, 문화의 중심은 예전의 부르주아들이 아니라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던 보통 사람들로 옮겨 가지요. 그 때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듯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주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기차’였습니다. 부우웅— 그 기차들이 오고 가던 생 라자르역이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이유지요.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니, 어제까지 감상했던 그림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생라자르 역은 근대의 상징 그 자체였고 도시의 활력을 엿볼 수 있는 일상의 활로 같은 존재였으니 당시 모네를 위시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매력적인 주제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모네에게 있어서 이 기차역은 인상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주는 ‘꿈’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차의 화통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가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그 곳에도 맞닿을 수 있을까요?


기차는 곧 파리를 벗어나 들판으로 이어집니다. 도시의 회색빛은 빠르게 사라지고, 창밖에는 푸른 숲과 황금빛 밭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은 고흐가 마지막 나날을 보낸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입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

파리의 공기가 정교하고 세련되다면, 오베르의 공기는 단순하고 거칠지만 솔직합니다. 마치 고흐의 붓질처럼요. 도시여행에서는 활력을 얻지만 한적한 시골길에서는 고요한 풍경을 마주합니다.


고흐 동상과 오베르 시청

작은 역에 내려걸으면 소박한 광장이 맞이합니다. 낡은 간판, 한적한 카페, 오베르 시청, 천천히 걷는 사람들. 파리의 대로와는 전혀 다른 풍경입니다. 모든 것이 단출하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베르 마을


역에서 몇 걸음 옮기면 라부 여관 Auberge Ravoux을 향한 길이 이어집니다. 담쟁이덩굴이 얽힌 담벼락, 고요히 멈춘 골목.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작은 순례처럼 느껴집니다. 고흐가 생의 마지막 발자국을 남긴 길을 그대로 밟고 있으니까요.


라부 여관, 고흐의 마지막 방


라부 여관, 마지막 방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라부 여관(Auberge Ravoux)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골 여관입니다. 그러나 1890년 여름, 이곳 다락방의 작은 방은 한 화가의 마지막 나날을 품었습니다. 고흐가 머물던 방은 지금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창문 하나, 좁은 침대, 벽지조차 없는 빈 방.


방 안에 서 있으면 묘한 침묵이 감돕니다.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붓질을 남겼던 화가가, 이렇게 소박하고 텅 빈 공간에서 마지막 그림들을 구상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지금은 “고흐의 방”이라 불리며 방문객들을 맞이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고독과 치열함이 스며든 작업실이자 피난처였겠지요.


여관 1층의 식당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무 탁자와 오래된 의자, 벽의 투박한 질감까지 19세기의 공기를 간직한 공간. 이곳에서 빵과 와인을 먹으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허기를 달래면서도, 마음은 늘 다음 캔버스의 빈 공간을 향해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테오 ― 형제, 후원자, 동반자


고흐의 곁에는 언제나 동생 테오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가족을 넘어, 예술을 믿어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테오는 미술상으로서 형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려 애썼고, 편지를 통해 끝없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고흐가 가난과 정신적 고통에 흔들릴 때마다, 테오는 경제적 도움과 정서적 지지를 동시에 건넸습니다. 그들의 편지는 형제의 삶을 이어주는 lifeline이었지요.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은, 결국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서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림을 통해서도,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래서일까요? 오베르 언덕 위, 고흐와 테오의 무덤은 지금도 나란히 있습니다. 담쟁이와 들꽃이 두 무덤을 덮으며, 두 형제의 영원을 조용히 이어주고 있습니다.


가셰박사의 집에서 가져왔던 덩쿨이 이제는 고흐와 테오의 소박한 보금자리를 가득 메꾸고 있습니다. 봉긋하게 피어난 노오란 튤립 몇송이. 고흐가 좋아하는 노랑색이 예쁩니다.


고흐와 테오의 무덤


오베르의 교회 ― 흔들리는 신앙의 형상


오르세 미술관에 갈 때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의 자화상> <아를의 고흐의 방>을 다시 보기 위해 고흐 고갱의 방에서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 풍경이 된 장소, 그 풍경 안으로 꼭 시간여행을 해보겠노라고 다짐했었던 떠올랐어요.


고흐 그림 속 바로 그 배경이 되었던 평범한 계단 위를 걸어보기도 하고, 노비 미술관의 정원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늘 자기만의 방식대로 표현하길 꿈꿨고, 또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견뎌내면서 반드시 그 일을 해냈어요.


숨을 헉헉 고르며 오른 언덕배기 위에 낯익은 교회 하나가 보입니다. 와우, 오르세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바로 그 교회입니다. 베토벤의 로망스 2번이 절로 떠오르는 이 그림. 교회 뜰 앞으로 황망히 뛰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꼭 누굴 닮아 20여때 참 많이도 좋아했던 그림입니다.



내 몸 세포 여기저기 도시에서 박힌 온 갓 잡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적막만이 흐릅니다.


마을 언덕 위에 우뚝 선 교회. 그림 속에서 보았던 <오베르의 교회>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실제 건물과 그림은 다른 세계 같죠. 현실의 교회는 고요히 서 있지만, 그림 속 교회는 푸른 하늘 아래 흔들리고 뒤틀려 있습니다. 믿음과 회의, 안정과 불안. 고흐의 내면은 단단한 건물조차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교회 앞에 서면, 우리는 그의 눈으로 본 세계를 함께 체험하는 듯합니다.



황금 밀밭 ― 마지막 붓질


마을 외곽으로 조금 더 걸으면 끝없이 펼쳐진 밀밭이 나타납니다. 여름의 바람이 불면, 황금빛 이삭들이 물결치듯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위로 불현듯 까마귀 떼가 날아오릅니다.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에서


바로 여기서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남겼습니다. 거칠게 휘몰아친 붓질, 불안하게 휘어지는 하늘, 검은 까마귀의 날갯짓. 많은 이들은 이 그림을 죽음의 전조로 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하려는 의지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절망 속에 있을 때에도,
어디선가 희망의 빛을 본다.


그 빛은 까마귀의 그림자 속에서도, 흔들리는 밀 이삭 사이에서도 깜박였습니다.


가셰 박사 ― 이해와 연민의 눈빛


1890년 고흐가 37세가 되던 해, 정신병으로 심약해진 그는 더 나은 치료를 받기 위해 남부의 아를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 북서부에 위치한 이곳 오베르에 터전을 잡습니다. 동생 테오는 피사로에게 닥터 가셰를 소개받고 주치의로서 형을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아마추어 화가 이기도 한 가셰 박사는 또 다른 동기간으로서 고흐의 절친이 되지요.



친구의 집에 가는 길은 멀지 않은 것처럼 가셰박사의 집은 고흐에게는 언제나 오픈된 공간이었습니다. 모델을 살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화가 반 고흐에게 있어서 친구나 그 딸의 초상화를 맘껏 그릴 수 있었던 건 망망대해에서 마주한 반짝이는 빛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난 <정원 안의 가셰 아가씨>와 <가셰 박사의 초상>의 그림이 더욱 따스하고 진한 색감으로 소곤소곤 말을 건네 오는 것 같았다면 기분 탓일까요! 이 그림들이 탄생했던 그 시간, 그 장소. 아,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었으니까요



가셰 박사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내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가셰는 단순한 치료자가 아니라, 마지막 여정에서 고흐가 의지한 인간적 동반자였습니다.



고흐의 마지막 여정


라부 여관의 좁은 방, 교회의 흔들림, 밀밭의 까마귀, 그리고 테오와 가셰의 그림자. 오베르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흐의 내면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그의 삶은 고통과 불안으로 흔들렸지만, 동시에 그림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예술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삶은 꺼져가는 듯 보이지만, 그 순간조차 영원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색채를 통해 뭔가 보여줄 수 있기를 …


태오에게,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 옛날 화가들은 영원의 상징으로 인물뒤에 후광을 그리고 했는데, 우리는 광휘를 발하는 선명한 색채를 통해 영원을 표현해야 한다.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보여주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Vincent Van 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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