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 변월룡 회고전에 다녀와서
지난 주까지 수/목 밤이 유독 행복했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알흠다운' 태후 전사들 때문었지요. 극중 데니얼 여자친구였던 고려인 예화씨, 그녀의 가족 일화가 나오는 대목도 참 인상이었어요.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고려인. 까레이스키라 불리던 이들...140여년전 가난과 기근을 견디다 못해 결국엔 본향을 저버리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에 발을 딛습니다. 그러다 스탈린 정책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지요. 학부 때 러시아 정치 시간에 배웠던 게 가까스로 기억나네요. 민족상 한국인이 분명하지만 국적상으로는 외국인으로 간주되며 태생부터가 '디아스포라'였지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나라 밖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이동하는 민족을 뜻합니다. 이들의 정서는 우리의 그 것과는 사뭇 다를 텐데, 정처없이 떠도는 그 영혼속에 묻어난 이야기, 이야기들은 때로 참 아프게 들려옵니다.
한국 근대 미술의 거장, '변월룡'을 아시나요? 말 그대로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름. 그 역시 고려인이었지요.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화가이자 교수로서 일생을 보냈다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읽고 그의 삶과 예술이 참으로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첫 회고전 이라니요!
서울 덕수궁, 국립 현대 미술관은 한국 근대거장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백년의 신화'의 네 번째 주인공으로 변월룡전 기획했네요. 라일락의 향기가 봄 날의 공기를 가득 채워 그마저도 삶의 기쁨이 되는 이 아름다운 4월에 말이에요. 우리 가슴속에 어떤 벅찬 감동을 주는 뜻깊은 전시회였다고 생각해요.
레닌 그라드 파노라마 - 영혼을 담은 초상 - 평양 기행 - 디아스포라의 풍경, 이렇게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회는 격동의 한 시대를 관통하는 한 예술가의 재능과 열정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20세기 현대미술 사실주의 계보를 잇는 이 멋진 화가가 있었다니 보물섬에서 값진 보물을 찾아 낸 기분이 절로 들었어요.
우리가 전혀 알 길이 없던 한 화가를 운명처럼 만나고, 20년의 세월동안 우여곡절 속에서 끝끝내 한국에서의 전시를 열게 된 그 배후에는 미술 평론가 문영대 선생님이 있었네요. 그 깊은 안목과 한결같은 열정에도 큰 경이를 표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들이 예술가에 대해 진실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이 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수 만큼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그 점에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말을 저는 참 오랜동안 곱씹어 보고 있습니다. 우리 맘속에서도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모양과 색깔로 재탄생 되기를 바라면서요.
사진기술이 발전하기 훨씬 이전에는 그림이 그 시대를 읽어준 도구가 되었지요. 예술가는 그렇게 우리 살아온 그 이면의 현상을 생생히 기록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요. 변월룡 화백의 기록화에서 한 시대의 장면장면들이 그대로 숨쉬어 있음을 보고, 영혼이 담긴 초상화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 한사람의 인생도 봅니다. 지면으로 그 감동들을 다 담기에 저의 생각과 학식이 짧은 게 참 아쉽네요. 행복한 봄날의 아침입니다. By Sara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