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제자팀 지음.
"저번에 아무개 가 급하다고 오천만 원을 빌려줬는데 보름 만에 갚으면서 고맙다고 이자만 오백만 원을 줬어. 이번엔 일억이 필요하데."
"내 지인이 갑자기 해외여행을 엄청 다니기 시작하더라. 알고 보니 분기에 8% 이자를 주는 채권에 투자했데. 나도 조금 넣어보려고. 그런데... 채권이 뭐야?"
언제부터인가 주변에서 이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행운으로 둔갑한 '고수익' 미끼를 뿌리고 누군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꾼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잠시 긴장을 놓고 '고수익'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혹하는 순간 내 쌈짓돈은 그들에게 홀랑 털리고 마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개념을 읽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사기' 행위로 알고 있던 '폰지 사기' 수법이 사실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아주 밀첩 한 관련이 있었다. 어쩌면 그 행위 자체가 자본주의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자본주의의 민낯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자본주의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이랬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만이 부가가치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 자본가 아래 있는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만으로 부를 축적하기가 매우 어렵기에 '주식'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기업'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할 것.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나는 그동안 물 위에 떠있는 자본가라는 배 한 척만 보았을 뿐 그 아래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거대한 자본주의 물길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 전체를 조망해 보니 그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폰지 사기'의 축소판이라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 모태가 되는 자본주의는 지금껏 이렇게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데 그것의 미니어처인 '폰지 사기'는 왜 범죄로 취급되어 처벌받는 것일까.
외부와 전혀 소통하지 않는 단일한 통화체제를 가지고 있는 한 섬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섬에서 유일하게 돈을 가지고 있는 시민 A는 딱 1만 원이 있다. 시민 B는 그 돈을 빌린 후 1년 후에 이자까지 합쳐서 1만 500원의 돈을 갚아야 한다고 해보자. 시민 B는 또 다른 시민 C에게 배를 구입한 뒤 그 배로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서 돈을 벌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시민 B는 1년 뒤에 1만 500원을 시민 A에게 갚을 수 있을까? 정답은 '절대로 갚을 수 없다'이다. 왜냐하면 섬에 있는 돈은 딱 1만 원일뿐, 이자로 내야 하는 돈 500원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선 A를 중앙은행으로 표현했지만 필자는 시민 A라고 임의로 변경.
여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폰지 사기'와 자본주의는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폰지 사기'는 이 난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지만 자본주의에는 있다.
그렇다면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A 시민이 중앙은행이 되어 또다시 500원을 찍어내고 그 돈을 다시 시민 D가 대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자'라는 개념은 이전에 물물교환 하던 시대에는 없었다. 화폐가 생산되고 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교환의 부가가치로 '이자'가 생겼는데 바로 이 '이자'를 주기 위해 사회에서는 빚쟁이를 만들어 끊임없이 돈의 양을 늘리고 있다.
‘돈의 양’이 끊임없이 많아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돈의 양이 많아지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돈을 창조하는 사회’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가장 핵심에 바로 ‘은행’이라는 존재가 있다. 은행이 있기 때문에 돈의 양이 늘어나고, 따라서 물가가 오른다. 우리는 흔히 물가가 오르는 것이 경제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략) 물가가 오르는 근본적인 원인은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도 아니고, 기업들이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은행 때문이며, 은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이다.
폰지 사기는 새로운 돈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즉시 자금 흐름이 막혀버린다. 그럼 그대로 파산하여 원리금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가 속출하여 주모자는 고발을 당한다. 주모자의 탐욕이 클수록, 경영 및 관리부실이 심할수록 그 바닥은 금방 드러나 곧바로 사기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은행'이라는 공인받은 기관을 통해 끊임없이 (화폐를 공급하여 대출을 일으켜) 빚을 늘림으로 바닥은 드러나지 않고 오래도록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라임' '부산저축은행'과 같은 사건을 통해 배웠듯 은행의 경영 및 관리부실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해도 사기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폰지 사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모방했다. 그것의 모태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악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대세적 흐름이 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잘 활용하지 못해 부를 축적하지 못한 사람을 어리석다 하고 반대로 그런 시스템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부를 늘린 사람은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다. 둘의 차이가 '빚을 늘릴 수 있는' 권리 하나뿐인데도 말이다.
“우리의 통화 시스템에 빚이 없으면 돈도 없습니다.” ‘빚지지 말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빚이 있어야만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은 때로 배신감까지 느끼게 한다. 악이라고 알아왔던 빚이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선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이 ‘빚’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이것 대문에 파멸에 이른다.
평생 소비하고 노동하며 빚을 갚아야 하는 건전한 빚쟁이를 늘려야만 자본주의는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한 사람 두 사람 빚을 청산하고 더 이상 대출을 일으키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그대로 파산하고 마는 것이다. 매년 화폐는 늘어나고 그것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매년 물가는 오르고 화폐 가치는 떨어지니 단순히 아껴 쓰고 저금만 해서는 부를 축적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에서 투자는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고, 과도한 학구열이 싫으면 학군 지를 떠나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싫으면 지구를 떠나야 한다.
좋아하는 중국어 성어 중에 '공부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学如逆水行舟, 不进则退)'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우리는 자본주의를 거스르면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밀려오는 물살에 떠밀려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해 바로 알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계속해서 공부해야 한다.
개인이나 가계의 금융 의사결정은 개개인이 지닌 금융이해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기의 학교와 사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금융 교육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하게 돼 있다. 이제 금융에 관한 지식과 활용 능력이 빈부 격차를 더 벌려놓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금융이해력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 능력이다.
(모두가 경험해 봐서 알듯) 점잖게 빼입고 친절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는 은행(증권사 포함) 직원들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상품을 권하지 않는다. 그들도 최대 이윤 추구를 목표로 달리는 기업의 일원으로 기업에서 강요하는 상품을 권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수수료나 판매 보수가 높은 상품이다. 때로는 투자를 권유하는 그들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엄마가 10년 동안 들었던 변액보험을 타고 한숨지었던 일이 생각난다. 10년 동안 꾸준히 차곡차곡 모은 돈의 이자가 겨우 10%였다. 10년 동안 10%면 일 년에 이자가 1% 꼴이니 2~3% 주는 시중은행 예적금 보다 한참 못한 것이다. 은행에서 이 상품을 엄마에게 권유할 때만 해도 '비과세' '안정적인' '추가 수익률' 등과 같은 달콤한 워딩으로 가입을 권했다. 그러나 10년을 꼬박 믿고 헌신한 대가는 그동안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인 샘이다. 그런데도 보험사도, 은행도 꼬박꼬박 수수료와 보수를 야무지게 챙길 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손해를 봐도 책임을 물을 대상도 없고 보상을 받을 근거도 없다.
돈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에 대해 모르는 것은 총 없이 전쟁에 나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금융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아이와 부모가 함께 금융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금융 교육은 단순히 유망한 투자종목을 고르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함으로 아래 물살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돈이 어디에 투자되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로 인한 이익과 수반되는 리스크를 내가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즉, 내 배는 내 손으로 직접 노를 잡고 저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노를 젓는 내 팔에 자신감과 힘이 들어가고 그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함께 참고하면 좋은 자료
유튜브: [손경제][커피타임] 한국 경기가 안 좋은 건, 부채 공포 때문입니다.
책: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 오건영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