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피드백에 목말라하는 존재
오래전 나는 소위 말하는 ‘파워블로거’였다. 내가 쓴 글은 포털 대문에 자주 등장했고, 많을 때는 하루 방문자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 한 번은 내 글이 2개나 동시에 포털을 장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블로깅 자체가 너무 좋았고, 연애하듯 즐기면서 했다. 블로그에 글을 쓸 생각만 해도 심장은 박진감 있게 뛰었다. 대부분 글의 ‘좋아요’ 수는 1,000에서 3,000에 육박했으며, 어떤 경우는 댓글이 1천 개 넘게 달리기도 했다. 물론 그중 1/3은 악플이었지만.
불특정 다수가 내 글을 읽으며 나를 궁금해했다. 지구 반대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소식이 끊겼던 오랜 친구와도 연락이 닿았다. 어디 미국뿐이랴, 호주 독일 등 전 세계에 흩어진 동창들이 연락을 해왔다.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 그제야 나타난 건지…)
한 가지 주제에 꽂히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앉으나 서나 글을 쓸 생각뿐이었다. 자다가도 블로그 글감이 떠오르면 불 켜고 일어나서 메모할 정도의 열정이었으니, 한마디로 말해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내가,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 열정의 1/10 만이라도 가지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왜 그럴까?
열정은 나이와 반비례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 열정이 사라지는 게 정말 사실인가?
몸이 노쇠하니 마음도 늙고 연약해지는 걸까?
영혼을 갈아 넣던 그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나?
나의 글쓰기 무기력 현상에 대해서 분석해본 결과 크게 2가지 이유로 요약되었다. 첫째는 개인적 이유, 두 번째는 사회적 이유이다.
첫째, 건강 상태 (글쓰기=정적 두뇌활동+동적 육체활동)
몸과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혼과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몸과 마음만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몸이 쉬이 피곤하니, 긍정적이고 활기차던 내가 점점 부정적이고 소심하게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는 건강이 무척 중요하다고. 그는 글쓰기를 위해서, 그리고 앉은 자세로 오래 잘 버티기 위해 매일 아침 10km 이상씩 달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돼?’ 하고 생각했었다. 글은 머리에서 나온 내용을 손으로 쓸 뿐인데 왜 다리를 단련시켜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이해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과 가슴으로 콱~ 와닿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나의 몸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달라진 몸상태로 인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달라진 마음 상태 또한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깊이 통감하고 있다.
올해 4월에 작고하신 소설가 고(故) 이외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쉰이 넘으면 장편소설을 잘 써내기가 힘들다.” 이유로는 ‘기억력의 감소’를 꼽았다. 하긴, 소설의 앞부분에서 사망한 인물이 뒷부분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다닌다면 모골이 송연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마법 포션이라도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라면 또 모를까.
예전의 내 글은 주체할 수 없는 기운과 힘이 글 밖으로까지 튀어나왔던 것 같다. 독자 중의 한 분으로부터 이런 말도 들었다. “여자인 척하지 마세요!”
나의 성별은 ‘여성’인데, 글만 읽어서는 뻗쳐 나오는 힘찬 기운을 보고 ‘남자’라고 여겼나 보다. 그런데 글 중간중간 나를 지칭하는 ‘언니’라든지, ‘이모’라는 단어를 봐서는 ‘여자’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그 독자는 나를 여자인 척하는 남자로 단정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요즘 글은 기운 승천하던 예전 글에 비해 공격성 및 진취성이 많이 떨어진다. 해오던 습관이 있어서 그때의 분위기로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하진 않은데, 신기하게 속에서부터 후들거림이 느껴지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세기의 지성인,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130 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평생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시던 분이다. 그런 분이 몹쓸 병으로 투병하실 때 “글을 쓰고 싶은데 도저히 써지지가 않는다”라고 하셨다. 글쓰기란 단지 머리로만 하는 정적인 작업이 아니라 몸도 함께 굴리는 동적인 작업인 것이다.
그동안 내게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젊어서 걸린 ‘암’이란 녀석은 나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일상생활이 무너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예뻐지고 싶은 기본적 삶의 영역마저 도난당했다. 그래서 나는 참 많이도 달라졌다. 한시라도 젊었을 때 많이 읽고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둘째. 피드백의 부재
Cancer Survivor 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브런치’에 올인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는 중이다. ‘노오오오력’이 부족해서일까. ‘노력’은 어디서 나오나? 아마도 ‘열정’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열정’의 출처는 어디인가. 말라가는 우물에 두레박을 늘어뜨려 바닥에 찰랑거리는 얕은 물이라도 길어서 목을 축이고 싶은데, 그 마저도 여의치 않다.
‘브런치’에서는 두레박을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피드백에 목말라하는 동물이다. 트위터 및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등장했던 십 수년 전, 소셜 네트워크 알람이 울리면 많은 커플들이 성관계를 하다가도 멈추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각 언론마다 심도 깊게 다룬 적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성욕이라는 육체적 욕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를 더 상위 가치로 둔다는 증거이다.
내가 한 말, 내가 올린 글에 누가 반응을 해주는가, 누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주는가는 자존감이나 자신감을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존엄성의 확인이 아닐는지.
미국 유럽 등지에서 Uber가 성공한 이유도 바로 이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택시를 부르거나 음식 배달을 시키면 그 순간 바로 반응이 온다. 기사가 누구인지, 차종은 무엇인지, 도착하기까지 몇 분 남았는지 등을 실시간으로 다이내믹하게 알려준다. 내가 한 ‘액션’에 대해 누군가가 ‘리액션’을 취해주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브런치’에서는 리액션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모처럼 없던 기운을 끌어다 쓴 글이 읽히지도 않고 그저 묻혀 버리는 느낌이다. ‘좋아요’ 받기도 쉽지 않고, 그 흔하디 흔한 댓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예전의 악플이 그리워지기까지 할 정도이다. 브런치가 원래 이렇게 생동감이 없는 플랫폼이었나 싶다.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 "프로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한다” 등의 말이 있다. 그렇다. 그렇기에 주변의 소소한 ‘피드백’에 목매다는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현재의 나는 ‘장인’도, ‘프로’도 아닌 범인이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미숙한 사회적 개체는 주변의 관심을 먹고 자라지 않는가.
얼마 전 결심했다. 과거의 ‘나’와 다투지 않기로. “아~ 옛날이여!”라며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좋아요와 댓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저는 어디에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꿋꿋이 견디며 글을 올려보려고 한다. <예술은 뛰어난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뛰어난 정신의 소산이다>라고 했던 고(故) 이외수 님의 명언처럼, 언젠가는 꾸준함이 재능을 이겨, 주변의 관심을 받는 날이 오리라 손꼽아 기대하면서…
<세 줄 요약>
여러분, 과거의 ‘나’와 다투지 마세요!
글을 잘 쓰기 위해 몸도 단련시키세요!
‘리액션’이 없더라도 우리 ‘액션’을 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