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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Jul 18. 2022

12월, 뺄셈의 달

저물어가는 해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숨이 가쁘다. 12월에 들어서니, 눈부신 오후 햇살이 잠시 머물고는 어느덧 해는 저만치 가 있다. 12월,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면 마법에 걸린 듯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낙엽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간다. 지난 11월엔 끝이 보일 듯하던 코비드 팬데믹이 오미크론 변이로 또다시 미궁에 빠지고,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기도 지나가고, 8월 말 미군 철수로 아수라장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내가 사는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고, 극심한 인플레로 곳곳엔 아우성이고…

2021년 한 해 내 삶엔 무슨 일이 있었나 돌아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매일 집에서 쳇바퀴 돌듯 생활을 해온 지 어느덧 두 해가 다 되어가니 시간의 경계가 없어져 모든 것이 흐릿하다. 올해 들어서며 나는 무슨 결심을 했나 싶어 1월의 기록을 뒤져보았다. 어느 곳에도 새해의 결심 같은 건 없었다. 작년 말에 25년간 일해온 회계와 금융에서 은퇴한 후 자유롭게 살리라 생각하며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은 듯하다. 

한 해의 일기장을 들춰보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리라 꿈꾸었던 은퇴 생활과는 달리 무척 바쁜 삶을 살았다. 직장에 매여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보리라 작정하고 이것저것 벌린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세이란 말을 탄생시킨 몽테뉴가 <수상록> 중 ‘한가로움에 대해'에 쓴 글이 떠올랐다. “최근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종류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피하고 살아야 할 남은 시간을 쉬며 조용히 보내려 은퇴했을 때, 나는 시간이 지나며 더 성숙해짐으로 이제는 그렇게 바랐던 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 전환하며 여유롭게 지내는 것 이상 더 임무를 맡는 일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내 마음은 기수에게서 벗어난 말처럼 어떤 기병도 요구하지 않을 훨씬 더 무모한 일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키메라와 같은 공상적인 괴물을 질서나 계획도 없이 만들어낸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봄까지, 경영대학원에서 한 강좌를 맡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조지 워싱턴대학의 제니 맥킨 모어 (Jenny McKean Moore: JMM) 기금으로 운영하는 작가 지망생 수업에 참여해 작가 수업을 받았고, 또한 봄에 12주 사진 강좌에 들어가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진 수업을 들으며 끄적거려 놓았던 노트를 정리하다가 마지막 수업 때 적은 몇 문장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사진사는 기술자인가? 예술가인가? 카메라 기술의 발달로 기술적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지만, 예술로서의 사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전달해야 한다. 사진은 빼는 예술이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아니라 있는 것 중 무엇을 빼고 남길 것인가가 중요하다.”

사진뿐 아니라 예술로서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얼마 전 함께 JMM 작가 수업에 참여했던 유코가 말했었다. “내 메모아 원고는 십육만 단어가 넘었던 걸 지난 몇 달간 잘라내 이제 십이만칠천 단어예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맥스웰 퍼킨스는 토마스 울프의 첫 번째 소설 <오 로스트> 원고를 받고 9만 단어나 잘라냈다잖아요?” 올봄, 지난 몇 년간 쓴 내  영문 글을 모아보니 3만 단어가 조금 넘었다. 9만 단어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까. 그렇게 공들여 쌓은 것들을 또 잘라내는 수련을 거쳐야 한다니…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시간이 없어 편지를 짧게 못 쓰고 길게 쓴다"라고 했나 보다. 

종종 삶은 각자가 빚어내는 예술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의 생은 흩어진 몇 단어로 끝나기도 하고, 혹은 산만하게 늘어진 문장을 맺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잘 정제된, 아름다운 시와 같이 남는다. 삶에 주어진 시간을 한 해, 열두 달로 나누고 살아갈 때 그 마지막 달인 12월은 한 해라는 작품을 정제하기 위해 비워내는 시간이다. 한 해의 그 많은 일 중 덜어내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2021년 내 일기의 새해 첫 장에 적어 둔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새롭게 다가왔다. “한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으리./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거나/ 한 고통을 식혀줄 수 있다면,/ 혹은 쓰러진 새 한 마리를/ 다시 그의 둥지로 오르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으리.”

2021년 한 해, 나는 누군가의 부서지는 마음을 따스한 손길로 받아준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상처를 싸매어 준 적이 있는가, 헐벗고 굶주린 누군가의 배를 채워 준 적이 있는가, 어느덧 밤하늘에 뜬 별을 세어본다. 

(2021.12.16)


미주 한국일보 주말에세이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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