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작가들에게 통수 맞은 썰

+ 드라마판 양아치들에게 천 만원 손해배상하라고 들은 썰

by 사라

때는 6-7 년 전, 내가 보조작가들을 처음으로 두 명을 거느리다가, 4명으로 대폭 늘렸을 때 발생한 일이었다.


한 명은 가장 나와 오래 일한 작가, 그 다음은 나랑 잠깐 일해본 작가였고

그 다음은 나랑 처음으로 일 하는, 내 손으로 직접 뽑은 두 명의 작가였다.


여기서 누가 통수를 쳤을지 맞춰보시오 (소소한 퀴즈)





상황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많은 보조작가를 투입한 이유는 꽤나 유우~명한 곳에서 드라마를 만들게 되어서였고 그쪽에서 빵빵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으며, 제작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였다.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분담을 빡세게 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린 10화까지의 대본을 빠르게 뽑았다. 그리고 나는 그 유우명한 곳에서 통수를 맞았다.


내가 너무 어리니까 (당시 27세인가 28세인가 암튼) 내가 보조작가를 하고 나머지 가장 오래 일한 작가를 막내 작가로 둔 채, 나머지 3명을 자르고 나이 많은 기성 작가를 메인 작가로 넣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10화까지 썼는데 통수를 쳐맞은 나는 분노에 사로잡혔고, 나머지 셋을 자르라는 것에 더 열받았다.

그럴거면 이 작품 안 한다는 발언을 한 채, 내가 쓴 대본을 꽁꽁 싸들고 칩거하며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건 일부 양아치들이 상습적으로 이 바닥에서 행하는 갑질 중 하나였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대부분 절박하다. 작가가 되는 게 쉽지 않으며, 보조작가로 이름 하나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니, 그리고 법률 자문을 구할 데도 없을테니 이런식으로 후려치는 것이다.


이걸 왜 당하냐 싶겠지만, 당장 '이거 작품 안 하겠다하면 계약 위반이니까 위약금 몇 천 바로 뱉어라'라고 협박을 하면 20-30대의 작가들은 재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이미 써진 초고 개념의 대본들을 그대로 들고가 내정 되어있던 기성작가에게 넘기고 그 작가는 보조작가로 데뷔를 하게 되는 것이다. 돈도 챙기고 커리어도 조금 아쉽지만 나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난 아쉬울 게 없었고, 꽤나 유리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유리했던 것은 점은 아래와 같다.


난 작가 말고도 할 수 있는 거 많았음.

ENTJ 특 발동함.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대나무 마인드.

미안하지만 법률 상담 받을 수 있는 인맥이 있었음.

웹드라마 분야에서 이미 짱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쉬울 것 없었음 (나에게 이때 하는 작품은 일종의 도전이었을 뿐)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이 변호사셨기에 난 부모님께 상황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바로 변호사를 통해 내용증명을 보내버리니 그쪽에서 날 만나서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내가 법률적으로 뱉어낼 돈은 전혀 없었고, 일이 커지면 그들만 손해이며,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뱉어야할 위약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작가님도 좋은 거 아니냐.

이번에 하면 다음엔 진짜 메인 시켜줄게.

그 나이에 보조작가로 데뷔하는 것도 엄청 큰 거다.

꼭 일을 크게 만들어야겠냐.

여태까지 쓴 게 아깝지도 않냐.


물론 아깝다. 내 피 같은 대본.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신이 쓴 원고를 누군가가 다른 이름을 달고 내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좀 과장하면 자식을 빼앗기는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말도 다 맞다. 그 나이에 보조작가 다는 것도 꽤나 큰 게 맞았고, 일이 커지는 것도 맞았다.


근데······ 일은 본인들이 키웠고, 이 나이에 보조작가 줄 거였으면 애초에 보조작가로 계약하면 될 문제였다.


그리고 이 바닥에 '다음'을 약속할 수 있는 건 절대 없다. 시시각각 바뀌는 미디어-콘텐츠 시장에서 '다음엔 너 뭐 시켜줄게' 따위의 말이 90년대에나 통했겠지, 지금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ㅋㅋ) 웃긴 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되게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대사를 쳤다. 저 협상을 하러 온 사람과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의 마지막 대사는 이랬다.


"차라리 전 죽겠습니다."


이러고 난 그럼 이만 수고~ 하면서 카페를 나왔다. 이후 계속 위약금을 보낼 거 아니면 나 계속 메인작가로 쓰라는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서부터 통수가 시작된다.


아무리 제작진들이 내 대본을 읽었고, 기획 과정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대본을 써본 사람과 안 써본 사람의 차이는 크다. 때문에 그들은 메인 작가와 보조작가들을 한 두 명이라도 빼내어 지들이 정해놓은 작가에게 붙이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러더니 그쪽은 내가 협상이 안 된다고 생각하자, 내 보조작가들을 한 명 한 명 불러 1:1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보조작가들을 불러 협상한다는 것을 듣고 기가 찼다. 세상에······.


물론 잠깐 협상 상태가 길어질 수 있으니 갑자기 일이 붕 뜬 작가들을 위해 나는 내 인맥을 활용해 보상을 해주려 했다. 이전에 일했던 회사들에서 연락이 왔고, 크고 작은 웹드라마의 작가를 맡으라고 한 다음 내 이름을 걸고 그 회사들과 계약을 진행했다.


"신인이긴 하지만 내가 뒤에서 다 봐줄테니까 믿고 함 써보세요."


그 회사들은 정말 날 믿고 그들과 계약하기 위해 계약서를 보냈고, 당분간 협상하는 동안 이걸로 먹고 살며 첫작품도 한 번 해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알다시피 거의 대부분 신인 작가들이었고 자신들의 작품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이 상황을 다행으로 여겼다. (게다가 이게 아니면 넷 중 셋은 짤리는 상황이었으니)


"그럼 계약한다? 너네 잘 할 수 있지?"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며 그 회사에 전화해 두 명이 일을 못하게 되었다며, 내 체면을 구기는 말을 해야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뽑은, 아무 커리어도 없지만 습작만 보고 뽑은 그 두 명의 작가들이 내 뒤통수를 거하게 쳤다. 그쪽의 협상에 넘어간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나와 협상할 필요가 없어지고, 내 작품은 내부적으로 정해두었던 기성작가에게 넘어가게 된다. 물론 그들은 나에게 위약금을 물게 되겠지만 나는 내 작품을 잃은 것이 된다. 크레딧에도 내 이름이 올라가지 않고 피나는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통째로 날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협상은 이러했다.


그쪽에서 하던 막내 생활이 아니라, 완전히 작품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주겠다.

잘 돼서 시즌2가 나오면 두 사람을 메인 작가로 고용하겠다.


이 말에 넘어가다니! 세상에.

잘 돼서 시즌2가 나오면 계속 쓰던 메인 작가를 쓰지 왜 쌩신인 작가를 고용하겠는가. 나 마저도 어리다며 쳐낸 사람들인데.


결과적으로, 그 작품은 1-3화(내가 정성을 다해 쓴 부분)에서는 괜찮은 반응을 얻었으나 그 뒤로는 내가 쓴 것과 다르게 내용이 바뀌며 폭상 망해버렸고 시즌2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으며 나의 통수를 친 작가들은 지금 뭐 하고 사는지 모른다.


그리고 난 위약금을 받아서 저축 열심히 하고 200만원 짜리 컴퓨터 샀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 두 사람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잠깐 대화를 하자 했다. 계약서에 사인 하기 전 킥오프 미팅을 하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둘은 협상에 넘어가게 됐고 나에게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 어두운 저녁 밤 골목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 난다. 둘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오물오물 말을 했다.


일단 '아 그럼 계약 내가 파토 내야 되잖아.'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우선이었다. 내가 "그럼 미리 말을 하지 그랬냐. 다른 애들도 계약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하자 그냥 죄송하다고 했다.


난 이들에게 추잡하게 보이기 싫었고 자존심도 꽤 많이 상했으며 크게 상처 받았다.


그리고 정말 믿었었다. 그들의 신념을 믿었다기 보단, 저 말도 안 되는 협상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들을 붙잡아 봤자 소용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서 잘 하고, 꼭 시즌2 따내라고.

나랑 여태 일 하느라 고생했다고. 잘 가라고.


이 말을 하자 둘은 내 앞에서 울었다. 울 사람이 누군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마지막으로 악수나 하고 보내줬다.


그리고 혼자 집에 들어가는 길에 펑펑 울었다. 사실 그때 나도 20대의 나이에 벌써 팀장급의 직책으로 밑에 사람들을 리드해야하는 입장이었고, 그게 너무 힘들었으며, 쌓이고 쌓였던 게 터졌던 것 같다.


한동안은 내가 뭘 잘못했을까 반성을 많이 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해줬으면 안 떠나지 않았을까. 내가 좀 평소에 이렇게 했더라면, 아니면 내가 너무 좀 심하게 굴었나? 하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이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알러지가 생겼다 (ㅋㅋ) 풀냄새 맡으면 재채기하는 기관지 알러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미숙한 사람들의 미숙한 결정과 미숙한 행동들이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이 떠날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를 알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라 선택과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이때 나는 상사들이 구박한다, 혹은 팀장이 일을 너무 못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상사 뒷담을 들으며 혼자 움찔거렸다. 'X발, 혹시 난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ㅋㅋㅋ)


그리고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구박은 받지만 책임은 없는 저 포지션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실수하면 누군가, 혹은 회사가 책임져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수하면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데.


한동안 이 배신 트라우마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취해야할 태도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말 큰 사건인 만큼 큰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다.


아마 그때의 일이 없었더라면(솔직히 그때 내가 잘못한 건 크게 없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서도) 난 지금 매우 교만하고 오만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걸 20대일 때 겪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40대, 50대에 겪었으면 변하기는 커녕 화만 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라는 생각만 하며. (하지만 난 그때 그들에게 정말 내 나름대로 잘 해줬는데ㅠ)


아직도 그날 울면서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를 때를 떠올리면 솔직히 좀 울컥한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어서 대처도 잘 되지 않았었고, 지금도 같은 걸 겪으면 일주일 정도는 폐인으로 지낼 수도?






쓰다보니 글이 주절주절 길어졌지만······ 암튼 이 글의 요약 및 결론은 이렇다.


1. 변호사 비용은 아끼는 거 아니다. (더글로리 - 하도영도 이런 말을 했었다)

2. 나쁜 일은 그보다 큰 크기의 교훈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득이다.

3. 금융치료는 최고의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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