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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진희 Mar 19.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한국에서 태어나서 떠나기 까지- 0세에서 10세까지

브런치에 어떤 글로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첫 글 시리즈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쉬운? 나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나름 독특한 경험을 해온 삶이라, 한국 독자에게 신선하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 배경인즉슨, 나는 한국 부모에게서 한국에서 태어나서 10세까지 한국에서 살았는데, 그 후부터 27세까진 해외에서 자랐기 때문. 다시 27세에 한국에 귀국하게 되기까지 그리 많지 않은 한국인이 내가 자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비슷하거나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릴 적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의 기억, 아니 기억 자체는 전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설명하길 인간의 기억은  항상 오류가 많고 정확한 장치가 아니라 '타임머신'에 가까운 상상력 머신이란다.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게 목적이란다. 그래서 어쩌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뇌를 더 잘 사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난 유치원이 아닌 미술학원에 다녔다. 부모님은 이때부터 자식 교육에 좀 남다르셨던 것 같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데 뭐하러 '학교 공부를 시키나, 애가 좋아하는 거 먼저 실컷 하게 하자! 의 철학이셨던 듯. 아기 때부터 손에 펜만 쥐어주면 스케치북 마지막 장까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모습을 보시고 미술학원에 보내셨단다. 그리고 매일 동요를 불러주셨는데, 정확한 음정과 발성으로 노래를 따라 하더란다. 그래서 합창단에 보내셨다. 학교에서 추천장을 주셔서 KBS 어린이 합창단에 합류했고 다양한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 몇 시간을 발성 연습하고 노래 부르기를 배웠는데, 난 여의도까지 엄마랑 가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왔던 기억만 있다. 어머니는 그때 다른 부모들도 아이들과 함께 와서 연습 끝까지 지켜보면서 천사 같은 노랫소리에 심취하셨단다. 어머니도 즐거웠던 기억으로 추억하셨다.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어릴 적부터 하게끔 내버려 두거나 지원해주는 부모를 만나 실컷 재미난 추억을 쌓는지 의문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유치부부터 성인까지 가르쳐본 내 경험에선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5살도 안된 아이에게 영어 문장을 외우게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영어 문장 하나 제대로 못 말해서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2~3시간 스피킹 과외를 몰아쳐하는 분도 있었다. 이분들은 어릴 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신나게 했었을까? 그러도록 내버려 두거나 한발 더 나아가 도와주는 부모님을 만났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분들이 더 많았다고 본다. 나이 들도록 자신이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다. 그 이유를 따지자면 역사, 사회학, 정신분석학까지 합세해서 연구 조사한 결과가 이미 많이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그저, 지금도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맘껏 놀지도 즐기지고 못하는 한국 사회여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나름대로 지금 이 순간, 뭐든 좋아하는 것, 재미난 것을 직접 해보고 즐기시길 바라본다. 


다시 내 어릴 적 이야기로 돌아와서, 


국민학교 다니면서 여러 가지 기억이 있지만, 더듬거려보면, 성별에 따른 차별을 어릴 적부터 느낀 것 같다. 제사상에 나도 절하고 싶은데 여자애라고 딱 잘라 안된다 못 박으시던 친할아버지의 말이 아직도 그때 억울했던 감정으로 기억난다. 학교 남자애들이 왜 내가 뚱뚱하다고 놀렸는지, 키가 크다고 거인이라고 불렀는지, 중동에 나가 일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가뭄에 콩 나듯 집에 오셔서 가족이 아닌 이방인처럼 잠만 자다 사라지셨는지,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그 많은 잡일을 하는 어머니가 왜 아버지에겐 밥상을 차리거나 청소를 하게 만들지 않으셨는지, 학교 골목으로 나를 부른 어떤 아저씨가 왜 내 가슴을 더듬었는지, 등...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는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엄청난 사회적 훈련의 시작이고 교육이란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이미 오랜 기간 성차별이 자리 잡은 남성주의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겨우 10세까지 살았던 나의 기억에 이만큼 아프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남겼다는 데서 그 강력한 힘을 알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 쭉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엄청난 차별을 체내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도망치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사회에 갇힌 채 성인이 되어선 어느 정도 극복했다 하겠지만 인간의 뇌에 새겨진 상처들은 절대 자동으로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요즘 추세에 반가운 마음이다. 더욱 열심히 꾸준히 오류를 수정해 나가길 응원하고 나도 죽을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와 내 남동생에게 말씀하셨다; "다음 주에 우리 말레이시아로 간다~ 알았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뭐 어디? 


국민학교 5학년을 끝으로 갑자기 해외로 가족 모두가 나가게 되었다. 딱 일주일 안에 나는 동네와 학교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고 학교 선생님들도 인사를 건네셨다. 유독 매일 날 놀리던 그 어떤 남학생은 '왜 아직 안 갔냐? 빨리 가버려!"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울며 집으로 돌아와서 주섬 주섬 내 물건들을 정리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나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그 짓궂은 말 한마디를 끝으로 한국 국민학교 시절이 끝났다. 나,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난생처음 공항이란 곳으로 가서 비행기에 올라 먼 열대 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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