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 진희 Mar 20.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말레이시아에 적응하기 - 10세에서 14세까지(PART 1)

한국을 출발해, 첫 비행을 하는 어린아이 둘을 혼자 데리로 먼 열대 나라로 가는 동안 어머니의 고생이 많으셨다. 내 기억에 난 비행기 이륙과 착륙 때 귀 고막이 찢어지도록 아팠고 남동생은 평소와 다르게 계속 배가 아프다고 울었었다. 그렇게 생난리를 치르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해서 어머니는 약국을 찾던 중, 말이 안 통해서,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일어로 길을 물으셨다고 한다. 영어가 아닌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없었다. 내 인생에도.


앞편에 썼듯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서 한국을 떠나기까지 중동에서 일하셨고, 동생이 아버지 얼굴을 잊어버려 오랜만에 귀국하신 아버지를 보고 "이 아저씨 누구야?" 했을 정도였다. 듣기론, 동생의 그 말에 충격을 받으셔서 가족과 더 이상 떨어져 살면 안 되겠다, 같이 모일 계획을 세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건설회사의 말레이시아 지사로 가신 후 우리 모두를 부른 것이다.


나의 10세부터의 인생은 아버지로 인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까진 전혀 몰랐던 존재였고 아버지도 나에 대해 잘 모르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같이 살게 된 시점부터 아버지는 내게 '최고의 아버지' 이미지를 심어주려 하셨던 것 같다. 왜 안 그랬겠나? 그 어느 부모도 자신이 자식에게 최악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그러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미처 간과하신 부분들이 꽤 있다. 실수를 하신 여러 가지 배경이 있지만, 나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꼽고 싶다.


아버지는 달변가에 활발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셨고 항상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웬만한 사람은 금방 아버지를 좋아했다. 외대 출신 영어와 인도네시아어에 능하여 외교관 또는 연기자를 꿈꾸셨던 분이기에 현지인과 매우 잘 지내셨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에게도 특이한 교육 방식을 택하셨고 자유롭게 해 주셨다. 하지만 역으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환상에 빠진듯한 선택도 자주 하셨다.


영어로 이런 말이 있다. "Building Castles in the Sky". 하늘에 성을 지어준다는 말인데, 달콤한 말로 실현 불가능한 것을 마치 있는 듯, 가능한 듯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는 바로 이런 식으로 딸에게 온 세상을 약속하셨다. 물론 꿈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진한 아이에게 날카롭고 아픈 현실만 들이대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슈퍼맨 같았던 롤모델에 대한 현실적 사실이 드러나고 팩트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실망은 더욱 커진다. 이때, 아이가 현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한데, 아버지는 더욱 꿈만 강조하셨던 것 같다. 왜? 자신이 못 이룬 것들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더욱 극대화해서 받아들였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꿈, 미래, 내 가능성을 인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항상 나를 치켜세워주고, 지지해주고, 언성까지 높여가며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하셨으니 말이다. 이와 반대로 아버지는 남동생에겐 매우 가혹하셨다. 남성성을 강조하며 아이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자꾸 시키셨고, 실수나 실패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몰아붙이셨다. 그래서인지, 남동생은 어릴 적 소심하고 겁 많고 내게 의지를 많이 했었다. 나도 동생이 안쓰러워서 최대한 보호하려 했거나 같이 혼나곤 했었다. 물론 싸울 땐 빼고. ㅋㅋㅋ 이 시절을 돌아보면, 말도 안 통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데 남동생이 없었다면 정말 외롭고 심심하고 힘들었을 거라 생각된다. 항상 붙어있으며 서로 의지하다 보니 싸우기도 했지만 지금도 내겐 둘도 없는 지원군이고 친구다.


그렇게 난 두 남성 사이에서 '한국'을 그려낸 것으로 본다. 무슨 말이냐면, 한국을 떠나온 후부터 내게 '한국'은 내 가족이 대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게 본의 아니게 '한국 남성'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강력한 파워를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독재자에 가까운 자리매김을 하셨다. 그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소하고 넘어서기까지 많은 개인적인 노력과 공부가 필요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 후,


뒤늦게 헐레벌떡 도착하신 아버지는 비행기 도착 시간을 잘못 알아서 늦었다며 화를 내는 어머니에게 변명하시며 우리를 맞이하셨다. 짙은 선글라스 안경에 바틱(말레이시아 전통 무늬를 새긴 염색천)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한 아버지의 그때 모습은 낯설고 강렬했다. 뒤꽁무니 날개? 까지 단 도요타 자동차에 올라탄 우리는 같이 살게 될 집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당시 사업 파트너였던 중국계 말레이시안의 집에서 몇 주 머물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인생 돌아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