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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진희 Mar 21.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말레이시아에 적응하기 - 10세에서 14세까지 (PART 2)


아버지가 창업하셨던 한국식 바비큐 식당, 당시 아버지 건설회사 행사 무대에 오른 모습.

아버지의 당시 사업 파트너였던 중국계 말레이시안의 집은 거대했다. 처음 보는 2층 집에 방이 6개는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정도는 웬만큼 먹고사는 집의 사이즈였다. 말레이시아는 아파트보다 집, 즉 하우스가 흔했다. 그 거대한 집이 그 후 며칠간 나와 내 남동생의 놀이터였다. 낮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셨는데, 아버지가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식당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주방 일을 도우러 가신 거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부모님은 우리가 잠든 후에야 돌아오셨다. 그 첫 며칠 동안 그 큰 집에 남동생과 나만 남아 하루를 보냈다. 무서워서 밖엔 못 나가고 집 안을 여기저기 탐험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벌레들이다.


열대 기후의 말레이시아는 온갖 다양한 곤충들로 가득했다. 난생처음 보는 도마뱀이 천장과 벽을 기어 다녔고, 동그랗게 생긴 딱정벌레가 표면 여기저기 부딪히며 '딱! 딱!' 소리를 냈다. 침대 밑바닥엔 거대한 바퀴벌레가 숨었고, 날개를 펼치면 이불 해도 될 것 같은 나방이 창 문 불빛 옆에 날아와 앉았었다.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괴롭힌 건 바로 흡혈귀 모기들이었다. 방금 한국에서 날아온 고깃덩이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자는 동안 나와 남동생의 다리와 팔 전체를 신나게 물어뜯었다. 새벽에 수십 번씩 잠이 깨어 팔다리를 긁어서 피딱지가 앉았고 참다못해 남동생과 나는 '다 죽여버리겠어!' 하며 모기약을 전부 가져와서 방 안 곳곳을 뿌렸다. 환기도 시키지 않고 어찌나 살포했는지, 눈 앞이 하얘지도록 방 안은 스모그로 찬 전쟁터 같았다. 모기는 물론 우리도 그 지독한 냄새에 토할뻔했다.


개인적으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계 말레이시안 동업자 집 안 한가운데 놓여있던 선조를 기리를 향초를 태우는 제단이다. 처음 보는 모양의 시뻘건 제단 위에는 항상 향초가 타고 있고 여러 개의 중국 신 조각상이 놓아져 있었다. 밤에는 빨간 전구 조명이 켜져서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남동생과 나는 화장실에 갈 때 서로를 깨워서 같이 가곤 했었다.


해외에 나가면 새로운 것들이 많은 게 당연하고 언어가 가장 힘든 부분일 것이다. 내게 어떻게 말레이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도 완성되진 않은 상태니까 다 포함하면 세 개) 새로운 언어를 두 개씩이나 한꺼번에 배웠냐고 물으면 좀 극단적인 표현으론 '단절'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무슨 뜻이냐면, 그때 말레이시아엔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아버지는 일부러 나와 남동생을 국제학교가 아닌 현지 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이곳에 왔으면 이곳 사람들과 사귀고 이곳 문화와 언어에 심취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철학이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 결단은 효과적이었다. 상당히 빠른 기간 안에 나와 남동생은 새 언어들을 구사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었고 현지 문화를 피부로 느끼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배운 첫 단어는 의외로 욕이다. 그것도 중국어 욕. 어느 날 늦게까지 한국 식당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동업자 중국계 말레이시안은 자신을 가리키며 우리를 향해 '치신!'이라고 말했다. 몇 번을 강조하며 말해서 우리도 모르게 따라 했고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말투였는데, 이 뜻은 '미친, 미친놈'이란 뜻이다. 얼마나 힘들고 사업이 고됬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래서였는지, 아버지의 식당 사업은 머지않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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