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문 外전: 궁금한 건 못 참아③]

‘문명’과 ‘야만’에 대한 오해

by 이진경


‘문명’이란 말은 오해와 의심의 소지가 꽤 많은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유에서도 그렇고 모르는 이유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문명의 상대어는 ‘야만’이 아니라 원시 자연 상태 그대로를 뜻하는 ‘야생’입니다. 야만(野蠻)이란 말엔 이민족에 대한 노골적 멸시를 담은 ‘오랑캐’란 뜻이 포함되어 있지요. 즉 야만은 종종 문명국들 사이에서 상대의 문명 수준을 폄하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혐오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명국을 자처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대에 대한 우월의식을 표현한 말이지요. 심각한 점은 역사상 이 말이 의식 차원에 그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문명의 이름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결국은 상대를 압살하는 (비문명적인)끔찍한 짓의 정당화 논리로 삼지요. 구대륙이 신대륙을 접수한 방식이나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삼키는 방식은 늘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종종 문명이 드러내는 두 얼굴은 애초에 야생과 야만에 대한 불명확한 인식과 혼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명은 야생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나 그것이 (비록 의도치 않았더라도) 존재에 가하는 잠재적 훼손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적 저항이나 극복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폭력성’('인류는 왜 문명을 택했나 I' 글 중에 나온 표현인데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이란 의미는 '야만'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야생과 야만은 꼭 같은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만 야생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때 냉혹하고 폭력적인) 지배 원리가 존재합니다. 야생의 동물들은 새끼를 낳으면 본능적으로 '냉혹한' 계산을 합니다. 가령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다고 하지요. (야생에서는) 다섯 마리를 다 기르려다가 다섯 마리 모두 죽어나갈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이런 계산은 진화 과정중 유전적 경험으로 이미 터득한 지식이지요) 다섯 마리 중 몇 마리를 생존시킬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 한편, 새끼들은 새끼들 나름대로 생존의 기회를 얻으려 형제를 제거하려 합니다. 어떤 곤충은 교미 중에 순전히 본능을 억제하는 물질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교미 상대의 머리통을 먹어치우지요. 인간도 야생에 길들여졌다면 이와 유사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야생이고, 야생의 생존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어느 시점에서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새끼를 꼭 다 죽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혹은 새끼를 낳아서 죽여야 될 상황이 되기 전에 적어도 아기를 낳지 않는(산아 제한) 방법을 사전에 강구할 수도 있지요. 또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극단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식을 희생시킬 때라도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에너지를 발산한 후에야 겨우 가능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동물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동물들이 인간이 주저하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건 야만적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그만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명, 하면 흔히 물자나 기술의 발달 등 물질문명을 떠올리기 쉽지만 저는 어느 시점에서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이 ‘주저하는 마음’이 문명의 핵심을 더 잘 드러내주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그(인간)는 상대를 향해 창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가 ‘주저하면서’ 결국은 욕설을 내뱉고 돌아섰다.

인간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문명 또한 마음의 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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