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야만’에 대한 오해
사실 문명의 상대어는 ‘야만’이 아니라 원시 자연 상태 그대로를 뜻하는 ‘야생’입니다. 야만(野蠻)이란 말엔 이민족에 대한 노골적 멸시를 담은 ‘오랑캐’란 뜻이 포함되어 있지요. 즉 야만은 종종 문명국들 사이에서 상대의 문명 수준을 폄하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혐오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명국을 자처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대에 대한 우월의식을 표현한 말이지요. 심각한 점은 역사상 이 말이 의식 차원에 그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문명의 이름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결국은 상대를 압살하는 (비문명적인)끔찍한 짓의 정당화 논리로 삼지요. 구대륙이 신대륙을 접수한 방식이나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삼키는 방식은 늘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종종 문명이 드러내는 두 얼굴은 애초에 야생과 야만에 대한 불명확한 인식과 혼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명은 야생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나 그것이 (비록 의도치 않았더라도) 존재에 가하는 잠재적 훼손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적 저항이나 극복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폭력성’('인류는 왜 문명을 택했나 I' 글 중에 나온 표현인데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이란 의미는 '야만'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야생과 야만은 꼭 같은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만 야생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때 냉혹하고 폭력적인) 지배 원리가 존재합니다. 야생의 동물들은 새끼를 낳으면 본능적으로 '냉혹한' 계산을 합니다. 가령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다고 하지요. (야생에서는) 다섯 마리를 다 기르려다가 다섯 마리 모두 죽어나갈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이런 계산은 진화 과정중 유전적 경험으로 이미 터득한 지식이지요) 다섯 마리 중 몇 마리를 생존시킬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 한편, 새끼들은 새끼들 나름대로 생존의 기회를 얻으려 형제를 제거하려 합니다. 어떤 곤충은 교미 중에 순전히 본능을 억제하는 물질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교미 상대의 머리통을 먹어치우지요. 인간도 야생에 길들여졌다면 이와 유사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야생이고, 야생의 생존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어느 시점에서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새끼를 꼭 다 죽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혹은 새끼를 낳아서 죽여야 될 상황이 되기 전에 적어도 아기를 낳지 않는(산아 제한) 방법을 사전에 강구할 수도 있지요. 또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극단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식을 희생시킬 때라도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에너지를 발산한 후에야 겨우 가능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동물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동물들이 인간이 주저하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건 야만적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그만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명, 하면 흔히 물자나 기술의 발달 등 물질문명을 떠올리기 쉽지만 저는 어느 시점에서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이 ‘주저하는 마음’이 문명의 핵심을 더 잘 드러내주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인간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문명 또한 마음의 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