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인문학]
고대 문명 이야기 <2부>

인류는 왜 ‘문명’의 길을 택했나 -II

by 이진경


기후의 안정화와 지리적 이점이 문명이라는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돼 주었다면(객관적 여건) 오늘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문명의 길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주관적 요인)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고대 문명 전반에 대한 교통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대라 불리는 시기는 최초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왕조가 등장한 기원전 5천년쯤부터 (로마제국이 멸망으로 분열된 후) 서로마가 멸망한 서기 476년까지를 말합니다. 홀로세 1만3천년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이 기간은 인류 문명의 초기 조건들이 형성된 과정으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속되는 문명 발달의 기본 구조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시기 성립된 고대 문명의 전역적인 분포를 보면 세계지도상 서쪽에서 동쪽 순으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강 유역의 인도/ 그리고 황허강을 핵심부로 하는 중국 문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시간순으로는 수메르 문명을 필두로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 왕조가, 뒤이어 약 천년의 간격을 두고 인도의 여러 왕조들이 득세했고,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중국에선 초기 국가 형태인 상 왕조가 탄생하지요. 이들 지역 모두를 묶어 ‘고대 오리엔트’라 부르지만 각 문명들은 사실상 지속적으로 서로 뒤섞여서 이후 그리스- 로마 문명 속으로 흘러들어가지요. 오리엔트 여러 지역으로부터 ‘총화’된 문명이 결국 서양과 중동 문명의 토양이 된 것입니다. 이 외에 기원전 1600년경부터 튀르키예 지역에 약 500년 간 존재했던 ‘히타이트 문명’도 꽤 알려져있지만 자체적으로 남긴 기록은 전무합니다(알려진 내용은 인근 수메르나 이집트 유물의 기록에 의한 것).


해당 문명권을 둘러싼 고대 제국들의 줄기찬 패권 경쟁은 고대 사회를 더욱 역동적이고 복잡하게 만듭니다. 최초로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 제국과 그 페르시아를 다시 정복하며 헬레니즘 권의 최고 사령탑이 된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한편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한때 최대 육상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 그리고, 결국 고대의 문을 닫는 주역이 됐지만 최장 기간 패권을 지속하며 서양의 심장부를 자처했던 로마제국의 이야기가 수천 년간 이어지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고대문명으로 알고 있는 마야, 잉카(마추픽추), 아즈텍 문명 등은 어느 대목에 등장하는 걸까요? 이들은 앞선 문명들과는 지리적으로 뚝 떨어진 신대륙 아메리카를 근거지로 한 또 다른 한 줄기의 문명사를 이룹니다. 이중 기원전 2000년쯤 중앙아메리카에 등장한 마야 제국만 고대 문명일 뿐 나머지 두 문명은 한참 후인 140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합니다. 이들 세 문명의 공통점은, 1600년대에 유럽 식민주의 세력 중 하나인 스페인의 정복으로 무너졌다는 점이지요. 그것도 허망하리 만큼 너무 쉽게.

6RcW8Uxet4Y 페루의 마추픽추

이상 굵은 가지만 대략적으로 서술해도 고대 문명사를 두루 살펴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 그 특징점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수메르가 최초 문명국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시기도 그렇지만 최초로 문자(쐐기문자)와 문자기록(점토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문자기록은 인류문명이 지식의 생산과 그 전승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선도적이고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파라오(태양의 아들)’란 명칭으로 왕의 신격화를 넘어 불멸의 존재를 꿈꾼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는 거대권력과 상형문자, 천문학. 기하학의 발달로 대표되지만 결정적으로 지나치게 '내세지향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 제국의 가상도를 보면 도시 역량의 절반 이상이 무덤을 세우는 데 할애된 느낌입니다. 사후 세계와 영원불멸을 지향한 이 세계관이 그들 문명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한편, 인도는 초기부터 16개 왕조가 난립했고, 카스트제도와 브라만교, 석가의 불교가 출현한 문명이지만 가장 자료가 빈약해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수메르, 이집트, 인도 세 문명이 지역적으로 인접한 곳들과 빈번하게 상호 역동적인 작용(전쟁과 교류)을 했다면 중국은 다소 예외입니다. 일찍이 첨단문명의 세 아이템인 나침반과 화약, 종이를 만든 주역으로서 중세까지도 인도와 함께 수학, 과학 등에서 서양학문을 선도했고, 독자적인 동양철학(유불선)을 확립해 견고한 정체성을 구현했지만, 어떤 면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라는 지리적 요건에 짓눌렸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향해 길을 닦는 시기에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 왕조는 ‘만리장성’을 쌓습니다. 고대 중국이 자초한 이 ‘고립’에 대해 <<지리의 힘>>의 저자는 ‘드넓은 땅덩어리를 지키고 내부를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년을 써버렸다’고 표현했지요.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제 여러 요인으로 방아쇠가 당겨진 이들 고대 문명국들이 이후 어떤 요인과 동력으로 인류사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이를 위해선 먼저 고대 사회에 나타나는 시대적 특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의 인식체계와는 달리 고대인들은 모든 면에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세계’를 살았습니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의 다종다양성과 차이들에 대한 인식이 고대인들에겐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녀 차이, 영토의 경계, 소유와 비소유의 구분은 물론 심지어 정상과 비정상, 자와 타에 대한 뚜렷한 인식조차 없는 미분화된 세계라고 할 수 있지요.

초기의 고대인들은, 생물학적 결정력이 높은 시기에 (개인 의식이나 사회적 관념 없이도) 확실성 높은 유전적 친밀도만으로 수십 명 규모의 씨족 혹은 혈족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시절을 겨우 지나왔을 뿐입니다. 이후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 조상에 대한 인식과 언어, 문화, 생활습관을 공유하는 더 큰 규모의 부족 사회를 경험하고, 그 후 도시국가들의 성립 전후로 부족 간 연맹이라는 집단형태도 경험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미분화로 인한 무질서와 비체계성이 지배적이었고, 집단을 이룬 개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언제든 흩어질 수 있는 모래알과 같았습니다. 개인의 행동양식을 어느 정도 한 방향으로 결정해주는 민족이나 (현대적)국가 개념은 아직 등장하기 전이고(이들은 모두 근대의 산물임), 위장된 평화라도 가져다 줄 지배적 질서도 출현하기 전입니다. 속된 말로 임자가 확실치 않은 것들투성이인 세계에서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서로 임자가 되기 위해 우후죽순 도발을 벌이는, 복마전 같은 형국이었다고 할까요? 이런 시기에 부족을 넘어선 집단을 형성한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생물학적 관계가 느슨한 타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어떻게 유대관계를 이루어 생존하고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고대 문명은 명실상부한 사회공동체가 성립한 이후에 직면한 유일하고도 중요한 문제, 반드시 해결을 요하는 이 긴급 사안에 맞선 대응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시대가 변화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인류를 따라다니는, 이미 미래까지 투영된 문제 설정이라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좋은 땅을 선점하고 먹고 사는 문제 등 현실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질서,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꾸준히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겠지요.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동 시설을 세우고, 최소한의 질서를 위한 법전을 만들고,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용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중요 과제로 떠오르지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개인의 자각에조차 도달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다수의 ‘합의’에 의한 설계를 도출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변세력의 일상적 침범과 위협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이 위중한 과업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신의 은총을 받는 강력한 지도자에게 어울리는 일처럼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이지요. 고대 국가들이 대체로 왕조 중심의 제국의 형태를 취하게 된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지도자가 힘이나 신뢰를 잃으면 공동체의 기반은 급격히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초기 도시국가의 이 근본적 불안정성을 강력한 왕권의 지배와 통제로 해결하고자 했던 고대 사회의 자구책은 왕이 신의 아들임을 사회구성원들에게 거듭 주입하거나(이집트의 파라오) 아니면 실제로 지도자의 자신의 힘과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고대 왕조들 사이에 왜 그토록 끊임없는 정복전이 되풀이 되어 벌어졌는지 이해할 만한 배경 중 하나입니다.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은 정복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과 마르지 않는 열정을 제국의 식구들에게 보여주어야 했을 겁니다. 그것만이 제국의 구성원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내부의 생산성을 발달시킬 역량이나 시간이 아직 숙성되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 정복을 통한 물자와 노예 획득은 사실상 최우선으로 가능한 경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이든 싸워서 얻는 자가 임자가 되는 게임의 법칙 안에서 끊임없는 주변국의 도발과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도 정복 활동은 왕의 제 1의 책무였을 테지요. 정복은 또 다른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고대의 끊임없는 정복의 역사는 고대의 왕들이 유난히 호전적이거나 탐욕스러워서라기보다는 고대 문명사회가 작동하는 두 개의 축. 즉 내부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안정화를 꾀하는 데 있어 외부에서 그 물적 기반을 정복전을 통해 끊임없이 수급하는 구조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이런 양상은 실제로 고대 그리스·로마제국 시기에도 한결같이 지속된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화려한 문명의 성과들 뒤에 감춰진 고대 문명의 그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어떻게 더 '잘' 공존하고 지속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인류 집단이 존속하는 한 언제나 유효합니다. 세상은 늘 변할 테고, 문명은 대체로 그래왔듯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겠지요. 그 해답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완벽하거나 훌륭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듯, 세상은 늘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아갑니다.


<다음 편 그리스-로마 문명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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