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기저에 흐르는 ‘심리적 동인’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
우리는 인간의 행동이나 행위 양식을 이해하고 싶을 때 종종 ‘심리’적 동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 뒤에 그 행동을 유발하는 감정적, 정신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늘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가 봅니다.
그렇다면 문명과 같은 거대한 패턴(일정한 양식)과 관련해서는 집단의 심리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심리란 말은 철학이 발생하고도 한참 후에 갈라져 나온 분과이고, 그 말이 등장한 시기도 중세가 다 지난 15, 16세기경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심리학은 거의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지요. 아마도 ‘심리’란 영역이 개별적 자아를 가진 인간, 즉 ‘개인’이라는 의식이 충분히 발달해야 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만 심리 현상은 심리학의 여러 학위 분과에서 드러나듯, 광범위하게는 신경, 감각, 감정, 정신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대인들에겐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중 집단이 공통으로 갖는 보편적 감각과 정서가 문명의 형성과 발달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하는 문명의 기저에 흐르는 고대인들의 ‘심리적 동인’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으니 유념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가볼까 합니다. 생명체가 신체 안팎의 자극을 신경을 통해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것을 ‘감각’이라고 하지요. 최초로 신경계를 가졌던 생물체는 외부 자극을 받을 때 그 자극이 생존에 유리한지 해로운지를 본능적으로 판단하지요. 하지만 신경 자체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단순한 생물체에게는 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쾌’와 ‘불쾌’의 감정 반응이 진화해 나옵니다. 쾌의 감각에는 ‘접근’ 신호가, 불쾌의 감각에는 ‘회피’ 명령이 떨어지지요. 원시 바닷속 생물은 쾌, 불쾌에 따라 몸을 이완하거나 반대로 움츠러드는 방식으로 원인 물질에 대처했지요. 인간의 경우는 생존반응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좋은 향기 등에는 가까이 이끌리는 반면, 불쾌함을 유발하는 모든 것들 앞에선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모자라 몸을 사리거나 멀리 달아나기 바쁘지요.
쾌, 불쾌의 감각이 생존을 위해 고안된 원초적 감정이라면 그 다음에 생겨난 감정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입니다. 일부 심리학에서는 모든 부정적 감정들의 뿌리는 사실상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감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쾌, 불쾌와 달리 두려움은 원초적 감정이라기보다는 경험적 감정에 가깝습니다. 원시 숲의 동물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동료를 보고 나서야 높은 곳의 위험성을 알아차리지요. 아기들은 실수로 손가락을 데어보기 전에는 촛불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또한 동물보다는 인간에게 특화된 감정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은 노화로 죽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지요. 약육강식의 먹고 먹히는 험악한 야생에선 무모함과 공격성이 종종 무기가 되고, 그런 이유로 늙기 전에 죽는 일이 다반사니까요. 역설적이게도 야생에서 살아가려면 오히려 두려움을 덜 느껴야 할지 모릅니다. 그에 비하면 고대 사회에서 인류는 점점 두려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됩니다.
토대가 허약한 고대 제국들 내부의 끊임없는 반란과 혼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는 이방인의 침입과 약탈, 썰물과 밀물처럼 반복되는 정복자의 출몰과 만행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야 하지요. 한마디로 고대 사회는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가 상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화약고' 같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인류는 이런 종류의 피비린내 나는 공포의 감각에 둔감해지기 어렵습니다. 그 공포의 감각은 그들이 그토록 유지하려 하는 그들의 사회가 그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예감과도 맞닿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