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인문학]
고대 문명 이야기 <3부>

고대 그리스 - 죽음을 고찰한 후에 가능했던 지극히 현세적인 문명

by 이진경

고대 문명, 특히 그리스 문명이 유독 인문학을 여는 주제 중 하나가 되는 이유는, 그 시기가 단지 인류 발달사에서 눈에 띄는 초창기, 즉 발생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초기’에 해당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다 핵심적인 이유는 오늘날까지 특별히 반박되지 않는 고대의 ‘우수성’ 때문이지요.


고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은 이제는 관용적인 문구로 통용되는 ‘고대의 지혜’라는 말에 잘 드러납니다. 옳든 그르든 이 말은 ‘고대 = 지혜로움’이라는 등식으로 읽힐 뿐 아니라, 고대인들은 그 뒤의세 시기보다도, 어떤 면에선 근대나 현대적 관점에서도 이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문명의 한 전범(戰犯)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현대인은 (널리 알려진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고대인의 영혼이 잘게 부스러져 생긴 조각’에 비유되곤 하지요.


실제로 인문학은 ‘고대의 지혜를 배우자’는 정신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로마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키케로가 처음으로 ‘Humanitas’ 즉 ‘인간다움’란 말을 언급하며 그리스 고전의 복원을 주장한 데서 인문학이 탄생했다는 것이 정설이지요). BC 146년 서남아시아에서 이집트(북아프리카)까지 정복을 완료한 로마제국에게 속주가 된 그리스가 바로 그와 같은, 본받을 만한 전범, 지혜의 현신으로 여겨졌지요.

강인한 육체와 열정 가득한 기세로 세계를 향해 진격의 행진을 거듭해온 로마인들에게 그리스가 가진 ‘이지적이고 세련된’ 정신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정신을 ‘머리’로, 로마의 막강한 힘을 몸통으로 하는 문화적 일체화 과정을 통해 그리스-로마제국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고대의 대제국을 건설했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 양 방향의 천하를 천년 넘게 가로지르던 그리스-로마 문화는 중세를 지나 근대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적어도 서구적 전통에서는) 인류 문명의 원류이자 본류로서의 지위를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지요. 이 시기 범 로마 지역으로 퍼져나간 그리스 문화, 그것이 바로 ‘헬레니즘(그리스화)’이고(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K culture와 유사한 개념), 이른바 팍스 로마나(BC 1세기부터 200년간 평화가 지속된 로마제국의 황금기)가 실현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와 같은 문화전략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을 매혹시킨 고대 그리스의 정신세계와 문화는 과연 어떤 특별함을 지녔던 것일까요? 이른바 고대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인류의 뛰어난 지성과 빛나는 정신을 앞서 구현한 고대 그리스의 우수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선 그리스 문명은 이전 시기의 수메르 문명을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와 유럽의 초기 도시국가들이 서로 충돌하고 교류하면서 빚어지는 문화의 혼합과 집적, 융합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분화된 세계에서 끊임없는 정복전이 펼쳐지는 가운데에서도 그리스의 철학은 아랍에 번역되고, 아랍의 수학과 과학은 그리스로 건너가고, 실크로드를 경유해 온 중국의 비단은 서역으로 아무 문제 없이 흘러들어갔지요. 문화는 흔히 생각하듯 ‘고유성’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연결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형성되는 과정에 그 본질이 있다고 하지요(문화가 ‘순수’를 명분으로 내세울 때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이처럼 여러 문명의 영양소들을 흡수하면서도 그리스에서 유독 높은 수준의 문명이 꽃피운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바로 오늘날까지 사회를 보존하는 데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는 상징질서로서 ‘정치’체제의 하나인 ‘민주주의’가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에서 이러한 정치체제의 춣현이 가능했는가 하는 질문이 이어지지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정치가 다른 곳보다 일찍 태동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의 지리적, 지형적 특징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논리에 민감한 ‘정치’가 작동하기에 앞서 발달해야 할 인간 의식의 한 부분, 즉 ‘이성’의 분화가 촉진되었다는 사실이지요.(그리스의 정치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리스인들은 현세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고대의 수메르인들이 그랬고, 일찍이 화약과 나침반을 만든 중국인들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스의 현세적 세계관은 그것이 역설적으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깊은 고찰과 고뇌로부터 생겨난 비관과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어느 시대나 사회의 표층을 뚫고 심층부를 보려면 문학이나 예술작품에 숨어있는 집단의 원형적 서사와 정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이 남긴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대왕을 모델로 한 신화 속 반신반인 왕인 길가메시의 모험과 성장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건국신화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또 다른 한 축은 친구의 죽음 후에 찾아온 운명에 대한 깨달음 뒤에 불멸을 찾아 나서지만 실패하는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길마메시>>는 그리스인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 문명의 정수를 담은 영웅서사시이자 대대로 교과서로 읽히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표면적으로는 트로이 전쟁 중에 등장한 영웅들의 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적장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되는 인간의 비극과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길가메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모두 고대인들의 인간의 숙명과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에 얼마나 천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 끊임없는 의문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고찰하고 이해하여 수용하지 않고는 한발짝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 본질성에 예민하고 철저한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스어로 운명(Moira)이란 ‘정해진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스의 모든 면은 그 명백한 사실의 인식에서 출발하지요. 죽음의 고찰 이후에 도달한 지극히 현세적인 세계관과 태도는 그리스 문명의 최대 상품인 이성과 정치, 철학, 비극을 포함한 예술·문화 등 인본주의에 입각한 각종 상징질서들을 만들어냅니다. ‘공산주의’(유토피아)에서 ‘안락사(유타냐시아)’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인 ‘입자’ 이야기까지, 현대가 고도의 지적,경험적 산통을 치루거나 엄청난 물적 자원을 동원해서야 고안 혹은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학문적, 사회적 관념들은 거의 대부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미 등장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고대의 영혼들에게 우리가 매료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 다음 편부터 그리스의 정치, 철학, 문화 등에 대해 차례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