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인류 이야기 <1부 > :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었나
인류가 생물학적 분류상 영장류에서 ‘사람속’으로 분화된 시점이 대략 6~7백만 년 전, 화석 발견으로 알게 된, 아프리카 지역 초기 인류의 생존 시기가 대략 2~3백만 년 전, 탄수화물 공급원을 주로 곡물로 한정하게 된 사건인 농경의 시작은 1만2천 년 전이니 대략 맞는 얘기지요. 그러니 현대인은 수렵채집인의 DNA를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간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어찌나 뿌리 깊은지 오늘날의 대형마트를 현대판 수렵채집의 장소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습니다. 사실 곡물 편중보다는 온갖 먹거리를 두루 섭취하는 것이 인류에겐 훨씬 더 유리하겠지요. 여튼, 초기 인류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옛날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단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동굴이 초기 인류의 대표 거처였으리란 것쯤은 유물 없이도 쉽게 짐작이 됩니다. 원시 숲에서 혹독한 기후와 포식자를 피하고 안정과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한 데를 찾기 어렵지요. 그런데 앗차, 동굴에 들어간 순간 곰이나 늑대 같은 포식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정은 정반대가 됩니다. 그런 이유로 초기 인류는 상당기간 동굴에 들어가길 피했을 확률이 오히려 높지 않았을까요? 동굴에서의 이 권력관계를 뒤바꿔준 사건이 바로 불의 발견입니다. 동굴에서 불을 사용함으로써 숲을 떠돌던 인류는 반영구적인 거주지를 확보한 셈이지요.
동굴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건 플라톤의 ‘그림자’ 이야기지요. 플라톤은《국가론》에서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빗대어 불완전한 '감각'으로 얻은 왜곡된 인식, 곧 우상이라 지적하면서 동굴에서 나와서 '이성'을 통해 진정한 실재, 즉 이데아를 마주하라고 했지요. 제 기억에 남는 동굴의 이미지는《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속 '동굴남자' 입니다. 결혼 이후 부부가 서로 어른스런 태도로 책임감 있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할 때 남자들은 오히려 침묵이라는 방패를 들고 자기만의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습성이 있다지요. 요즘엔 동굴이 그다지 매력이 없는지 그저 덕지덕지 붙은 시간의 살점 덩어리 같은 종유석이나 보러가는, 관광지 이상의 의미는 없어진 느낌입니다만...
동굴은 선사시대 인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 유적지입니다. 땅에 묻혀있는 몇 점 토기나 도구들도 있지만, 인문학에 영감을 주는 건 동굴의 벽화입니다. 동굴의 벽은 특수한 조건 때문에 보전되기 쉬운 면이 있어서 뒷 세대에게 조상을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어주곤 하지요. 저는 이 동굴이 최초의 인문학 텍스트가 아닐까, 적어도 핵심적인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인류는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야생 숲에서 포식자를 피해 사냥하고, 물고기와 각종 열매를 모으며 하루종일 고단하게 움직였을 겁니다. 이와 같은 압도적 자연환경이 주는 긴장 상태에 고착돼 있으면 인지적 유동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필요한 건 오직 자연을 알고(자연지능), 자연을 활용하여(도구적 지능) 생존하기 위한 지식을 얻는 일 뿐이지요. 인간의 에너지가 이렇게 생존지식 습득에 매여 있는 시기를 know-how 의 시기라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늑한 동굴로 되돌아와 비로소 긴장된 환경에서 분리되었을 때, 인간은 동굴 벽을 무심코 바라보다 먼저 왔던 곰이 자기도 모르게 찍어놓은 곰발바닥 자국을 발견합니다. 그 옆에 자기 손바닥을 살포시 찍어봅니다. 찍힌 손자국을 보며 야릇하고 재미있어 하지 않았을까요? 시작은 장난 같았지만 점차 복잡한 그림으로 발전합니다. 동굴은 안전하고, 시간은 많으니까요. 낮에 본 동물들과 해와 달을 그리다가, 점점 바람, 소망, 의식(儀式)과 관련된 추상적 관념을 담습니다. 그렇게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고유한 개인의식이 벽화에 투영되기도 합니다. ‘자신을 마주함’의 순간이 될지 모릅니다. know-how가 아니라 know-why 의 단계입니다. 인문학의 텍스트인 상징체계의 출현입니다. (이 단락은《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에 나오는 쇼베동굴 이야기와 관점을 일부 차용하였습니다).동물들은 보통 벽에다 이런 짓을 하지 않지요. 저에게는 이때가 인간이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상의 한 갈래가 아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가치를 매기 줄 아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시작되는 출발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know-how에서 know-why, 즉 살아남는 방법에서 근원과 이유를 묻는 사고로 확장되는 과정, 여기까지가 제가 ‘동굴인문학’이란 조어를 써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덧붙여 생각나는 게 있어 마저 쓰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AI 이야기가 무성합니다. 시대가 이전과는 완전 달라질 거라고 합니다. 허풍에 그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때에 이런 옛날 ‘고리짝’같은 이야기가 뭐가 쓸모가 있나, 생각도 듭니다. 어느 철학 교수는 AI의 출현은 곧 ‘사고의 외주’라고 표현했습니다. 웬만한 건 AI가 더 잘하는 시대가 될 테니까요. 이제 사람이 배우고 익히며 ‘숙련’하는 시대는 끝난 게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또 이제부터는 AI에게 ‘질문을 잘 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저는 또 이런 의문이 듭니다.
질문이야 말로 철학을 비롯한 모든 지식과 사고의 추진력입니다. 역으로 사고는 '질문력'을 높힙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의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간파했을 뿐 아니라 그런 자신의 생각을 평생에 걸쳐 실행하고 다녔기에(만나는 폴리스 사람들을 붙잡고 계속 질문하며 괴롭혔지요) 그 어떤 철학적 주장 하나 내놓지 않고도 철학의 아버지라 인정받고 있는 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