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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아 Jul 04. 2017

#11. 함께하기 위한 [혼자하기]

혼행·혼밥·혼술 - 1인 문화를 사회문화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Intro; 1인문화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


   최근 혼행·혼밥·혼술 등 1인활동 문화가 주목을 받고 있다. 미디어들은 이러한 '신생 트랜드'를 이해보려는 움직임으로 관련 TV프로그램과 기사 및 디지털 컨텐츠를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는 요즈음이다. 대한민국 1인가구 520만명 시대 - 4명의 1명은 혼자 살고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우리는 처음으로 1인가구가 다인가구를 넘어선 시대의 변곡점을 살아가는 중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증가로 자연스럽게 혼밥·혼술·혼행·혼영과 같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생겨나고 있다. 향후 1인가구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1인 소비자들을 겨냥한 기업들의 상품개발과 마케팅 움직임이 매우 활발한 실정이다.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1인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있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59%)'이며 소위 이러한 개인활동 문화는 1인가구의 증가로 인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예스24 설문조사

   위의 내용은 최근 미디어가 혼자하는 문화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표면적으로는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측면에는 무언가 깊이있는 분석이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몇몇 기자들은 혼자하는 문화를 고독한 삶의 모습으로 연결짓기도 하고 개인주의의 양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한 TV프로그램에서는 'N포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2030대 삶과도 연결시켜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행위로 1인활동을 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석들로 지금의 [혼자하기]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 말하고 있는 혼자 밥과 술을 마시고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는, 소위 [솔로족] 부류의 사람들은 고독하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그들은 인간관계를 포기하려는 성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단편적인 경향과 편협한 근거만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현상을 이해해보려는 매체들의 시선이 나로서는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미디어의 힘은 무섭다. 그들이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에 따라 대중들에게 특정 대상이나 주제를 이해하는 프레임(Frame)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의 인식의 틀로 작용하여 온전한 이해를 방해하고 편견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두드러지고 있는 1인 문화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이해해볼 순 없을까? 옳고 그른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시각에서 이 문화를 바라볼 순 없을까? 미디어가 내는 목소리에 대한 아쉬움과 내 안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결국 이렇게 관련해서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혼자하는 문화를 좀더 깊이있게 그리고 개방적인 시선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글, 더 나아가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혼자하는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나도 혼밥해봤다'며 1인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 시국(?)에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다.


1인문화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 (출처 : 채널A 관련기사)


1.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용기.


   개인적으로 혼밥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된 계기가 있다. 2008년 대학생 시절 미국 맨하탄으로 1년정도 짧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고된 일을 마치고 타지에서 맞는 주말 아침 - 내가 머물고 있었던 거주지에서 3블럭 떨어져 있는 까페에서 10불짜리 브런치를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 곳은 그리스 음식을 파는 까페 겸 식당이었는데 무한으로 리필이 가능한 커피와 함께 버섯과 염소치즈가 잔뜩 들어간 오믈렛, 그리고 버터에 구운 바삭한 밀빵 두 조각을 한끼 식사로 먹는 행복감은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주중에 쌓인 피로를 녹여내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9년 전, 이 식당을 혼자 방문하는 데까지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여자가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그것은 당시 꽤 낯짝이 두꺼워야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왜 혼자 밥을 먹느냐?'하고 말하는 듯한 연민과 의아함이 보이는, 혹은 신기함이 섞인 그 오묘한 눈길을 무시한채 밥을 꿋꿋히 먹을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적어도 그 식당을 처음 홀로 방문하기 전까지는.


"몇 명이세요(How many)?"
"저 혼자입니다(One by myself)."


   '혼자있다'고 말하는 순간만큼 자신의 취약성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까? 그렇게 나의 연약한 상황을 고백하는 순간, 식당 점원은 밝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테이블로 인도했다. 혼자 찾아온 나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점원의 태도에 놀랐고 그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았던 풍경, 여기저기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또한번 놀랐다. 신문을 요깃거리삼아, 또는 창 밖의 도시풍경을 한없이 바라보며 여유롭게 주말 브런치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그들의 모습은 나에겐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 대학생 시절 - 우리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을 친구들을 찾는 것이 일이었으니까. 친구들과 시간이 도저히 맞지 않는 상황이면 어쩔 수 없이 간단히 샌드위치를 사서 후딱 먹어치우거나 밥을 거르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혼자 있다면 밥을 한 끼 온전하게 먹는 즐거움쯤은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23살이 되는 해 미국에서 [혼밥]을 배웠다.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꽤나 수월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기 전 주까지 나는 그 곳에서 브런치를 즐겼다. 주말 중 하루 오전은 꼭 그리스 식당에서 보내는 그 행복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깨알았다. 혼자 있더라도 한 끼를 온전히 맛있게 먹는 것 - 그것으로 오는 행복감을 나 스스로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밥을 먹으며 나를 채워내는 시간 - 지금 생각해보면 그 브런치 메뉴가 그렇게도 맛있었던 것은 내 생에 처음 즐겨보는 '혼밥'의 순간이 너무 신선하게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런던의 어느 한 까페의 모습 - 테라스에 제각기 혼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2. 함께하기를 당연시하는 문화.

   

   그렇게 맨하탄에서 혼밥을 경험하며 느꼈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 내면의 충족감은 나에게 대한민국 사회에 흐르는 집단주의(Collectivism) 문화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과 비효율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타국가에 비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과거 농경사회 두레와 품앗이제도는 농경사회의 필요한 일손을 마을단위로 충당·교환하는 노동제도였고, 1970년 초 새마을운동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마을단위로 공동체의식을 고취시키고 농경사회의 근현대화를 이룩하는 데 중심역할을 한 국가적 의식개혁운동이었다. 또한 1997년 국가파산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했던 시절 전국민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은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국민들의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한 국제적 모범사례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집단의식은 이 사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정신이자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해도 과함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집단주의에도 부작용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가치가 개개인의 그것보다 더 우선시되기 때문에 개개인의 다양성과 개성을 제한한다. 또한 집단에 통용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경우 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잘못되었다고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개인은 개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고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수용적인 사람이 돼버린다. 사회는 획일화된 모습을 띈다. 결국 집단의 가치를 잘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인정받고 리더가 되며 훌륭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훌륭한 집단만이 있을 뿐이다.

   1인가구의 수가 크게 증가하지 않았을 때에도 혼자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은 분명 존재해왔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되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사회적 문화풍토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식사를 하기 꺼려했던 것이다. 만약 2008년도에 한 외국인이 한국에 방문하여 똑같이 혼자 점심을 먹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당시 우리가 받을 시선을 그 역시 동일하게 받았을까?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활동이 가능하고 존중받는 문화권의 사람이라는 이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뉴욕에서 혼자 브런치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행위는 사회에 통용되는 가치관과 문화의식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며 평가될 수 있다.

   결국 미디어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혼자 밥을 먹는 행위가 증가하고 있는 원인을 단순히 1인가구의 증가로 보아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 현상을 들여다보면 혼자사는 사람들만이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아니다. 혼자하는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과거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에 의해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이상 개의치 않는 의식과 태도의 변화에 있다. 물론 1인가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혼자 활동을 해야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혼자 살면서도 여전히 혼자먹는 것을 불편해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따라서 1인가구 여부에 상관없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또는 혼자 먹고 싶은 상황에 당당히 식당을 찾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혼밥을 할 수 있다. 곧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나의 선택에 따라 당당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실천적 행동이다. 이는 집단주의 문화로 존재해왔던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가치관, 의식적인 변화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혼자 있어도 잘 차려진 한끼 식사를 먹는 것 - 그건 곧 나를 소중히 여기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3. 혼자하기; 와이낫(Why not)?


   우리는 하루 90% 이상 되는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출근길 사람들로 꽉찬 지하철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며 학교로 회사로,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일과를 마치면 우리는 또다시 가정이라는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삶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다양한 집단 속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의 합인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집단의 구성원 된다는 것 - 그것은 곧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회적으로 내재된 규범과 책임의식은 집단문화가 되어 그 어느누구도 직접 이야기해주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모습 속에 과연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나를 위해 보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을 살다보니 그 속에 나의 삶은 남아있지 않게 되는 현실. 결국 우리는 텅 비어있는 것 같은 공허감과 허무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밥 먹는 시간만이라도, 아니면 퇴근 후 저녁시간 만이라도 혹은 일년 중 한두번 존재하는 휴가시간 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지 묻고싶다. 이를 정말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보는 것이 맞을까? 함께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사회에 혼자하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1인 문화를 단순히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적인 행동으로 단정짓는 것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다. 물론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이 어려운 상황들은 존재할 수 있고 이를 판단해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부분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함께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사회분위기와 집단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 권리는 '함께해야만 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배척되고 소외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인문화에 대한 매체의 시선으로부터 놀랐던 부분은 마치 해서는 안되는 부정적인 행동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화를 바라보고 있는 점이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 오랜시간 흐르고 있는 집단의식과 문화를 거스르기에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 1인문화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만약 혼자하는 문화가 경계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면서 내용을 구성했다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의 시선이 아닌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 대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문득 사회생활을 하다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혹은 '내가 누굴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하는 물음이나 회의감이 들었던 적이 있었을까? 인생의 많은 시간을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집단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을 내것으로 소유하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하루 중 비록 적은 시간일지라도 '이 시간만큼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을 내 삶에 챙겨보자. 하루 중 잠깐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한시간 정도 운동을 하는 시간도 혹은 주말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등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느낌을 주는 모든 활동이 의미가 있다. 솔로족이라 불리는 사람들만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 혼자 있을 때에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회 - 그것은 어쩌면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 속, 집단 속에 작은 개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4. 나를 채워내는 시간.


   자, 지금 한번 '나, OOO'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기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부모님의 딸이자 어느 학교의 학생, 또는 특정 회사의 직원. 우리는 사회화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나 자신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에 익숙하다. 집단이 곧 나를 대표하는 것처럼 살며 마치 그 타이틀이 내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의 나, 가장 가까우면서도 친밀해야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는 매우 서툴다. 도대체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잘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싫어하고 잘 못하는지. 또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거나 슬픈지 등등. 위의 리스트 정도는 내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쉽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선호도는 집단의 가치와 요구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집단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교육 속에서 자라다보니 나 스스로의 가치는 계발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요구사항을 표현하고 나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학교·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혹은 사회가 높게 평가하는 가치와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간다. 결국 그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 것이 아니기에 공허감을 느끼며 때로는 뒤늦은 방황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집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의한 삶으로 다시 세우는 변화가 필요하다. 특정 집단을 위해 일하는 것도,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것도 결국 내가 원하고 선택한 결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혼자 보내는 모든 활동과 시간들은 외부로 향해있는 삶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신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외부자극을 잠시 차단하고 자신을 채워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사람들과 집단활동에서 찾아오는 삶의 피로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다. 여러 집단에 속해 살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나된 삶 - 이러한 삶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며 수시로 나를 채워낼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5. 나를 알아가는 기회.


   개인적으로 자기자신을 알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10대 20대에 많이 하기를 필자는 권하고 싶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집단의 가치를 따르고 받아들이는 일과 무작정 집단의 가치를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 점에서 20대 시절 혼자 다녔던 여행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관찰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자극제가 되어 주었던 것을 고백한다. 태어난 지 23년이 되는 해, 처음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지구 반대편만큼 아주 멀리 떠나온 세상에 나혼자 우뚝 서있던 경험은 처음으로 나를 독립적인 개체로 바라보게 했다. 부모님의 딸이 아닌 나 '이세라'라는 한 사람으로서, 부모님 인생의 일부로서 내가 아닌 내 인생에서 부모님을 바라보게 되는 시점의 변화가 일어났던 순간이었다. 인생이란 여행을 하는 주체는 혼자 여행을 하는 이 순간처럼 결국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 - 마치 선박의 키를 잡은 선장이 된 것 같은 막중한 책임감과 독립성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홀로 여행하는 순간 찾아오는 모든 상황이 혼자이기에 더 생소하고 더 크게 다가온다. 혼자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도 쓸쓸함이 밀려오는 순간 우연히 길에서 이야기를 하게되는 여행객들과도, 처음 방문하는 도시와 그 모든 풍경들이 내 인생에서 혼자 맞이하기에 더욱 벅차다. 외로움도 설렘도 감동과 환희도 모두 두세배는 더 크게 다가온다. 또한 다시 돌아갔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내가 속해있는 집단들이 더 의미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바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여행지에서 말이다.

   또한 혼자 여행을 하면서 부딪히는 모든 상황들을 혼자 판단해서 나아가는 것도 인생의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우는 데 좋은 기회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상황들 속에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를 집중해보는 것도 나에대한 좋은 관찰이 된다. 함께하는 여행은 경험을 함께 공유하기에 외롭지 않기에 즐겁지만, 혼자하는 여행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에 의미가 있다. 30대가 된 지금도 나를 알아가는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20대시절 여행을 통해 처절하게 발견했던 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통한 생각들은 30대 또 달라지는 나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토대가 되어주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인생은 혼자하는 여행을 닮았다 - 처음 가는 길이라는 것과 혼자 간다는 점이다. (사진출처 : 구글 검색결과)


Outro; 함께하기 위한 혼자하기.

   

   혼자하기; 혼자 있을지라도 거르지 않고 한끼의 식사를 챙겨먹는 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내면을 채워내는 일, 여행을 통해 내 인생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키워보는 일- 이 모든 행위들은 결국 더 잘 [함께하기] 위함이 아닐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는 결국 더 건강한 나 자신을 만나는 타인과 있기에. 그리고 단단한 자신 속에 이 사회와 사람들을 더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길테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혼밥족, 혼행족, 솔로족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고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활동과 시간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관련한 모든 활동들이 더이상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열린 시선과 개방성이 필요하다. 나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나를 둘러싼 사회,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음을 잊지말자.

   개인적으로 TV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좋아한다. 혼자 살고 있는 연예인들의 솔직담백한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개방성과 열린 시선이 존재한다. 피규어를 너무 좋아해서 일본에 혼자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혼자 살기에 내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자유도, 때로는 혼자 밥을 먹을 때 깃드는 외로움도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의 즐거움도, 이 모든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삶의 부분부분들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옳고 그름의 시선이 아닌 다양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개개인의 삶은 창의적이고 무지개빛깔처럼 아름답다.

   우리 사회에 최근 증가하고 있는 [혼자하기] 문화를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이 하는 활동이나 가치관으로 이해하지 말자. '프로혼밥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혼자 밥을 먹는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에 의해서 자신을 챙겨내는 실천적인 용기가 있을 뿐이다. 또한 혼술하는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항상 혼자 술을 먹는 것이 아니다. 더 건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 내면의 나를 안주삼아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 있다.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때때론 혼자하는 여행도 우리 삶에 필요하다. 혼자하는 문화란, 결국 더 건강한 나 자신이 되기위한 약간의 공백인 것이다. 여백의 미는 사람과 사람간, 사람과 집단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나혼자 산다 [이시언]편 - 일본 여행 중 발견한 게임기를 보며 소년처럼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이다. (출처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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