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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Jan 02. 2024

새해같지 않은 새해

D-59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연말마다 지난날의 게으른 나를 원망하며, 새해에는 바지런하고 멋진 내 모습을 상상하며 다이어리를 샀었습니다. 거의 새로 태어나야 가능한 수준의 계획도 거침없이 세웠었습니다. 무모할수록 지금의 나와 멀수록 좋았었습니다.  이미 새해, 1월 1일, 새시작의 달콤함에 도취된 상태였습니다. 저는 성장이 아닌 '변태'를 하고 싶었나 봅니다. 인간으로서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꿨었네요. 


   새 다이어리를 사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 과거의 나는 사라집니다. 그렇게 묻어두려 합니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순간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짧으면 1주일, 길면 한 달 사이에 온갖 핑계들과 세포에 새겨진 '습'에 어느 순간 끌려다니는 저를 발견합니다. 예상했던 순간입니다. 그럼 다시 계획 수정입니다. 수정-보완-수정-보완을 반복하다 어느새 나 자신에 대한 은근한 실망감이 깔립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특히 나 생리 전증후군이나 야근이나 남자친구와의 다툼이라도 겹치는 날에는 포기해 버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는 꼭 3개월에 한 번씩 그 순간들이 찾아왔고, 약 한 달간의 방황 끝에 다시 열심인 3개월이 찾아옵니다. 이 패턴 속에서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기록'하고 '정리'하기를 아예 놓지는 않았다는 거네요. 

다이어리


    매년 새해 년월이 다 적힌 다이어리를 사다가, 3개월 주기로 오는 그 패턴을 반복한다는 걸 알게되면서 만년다이어리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yealy, monthly, weekly, daily의 형식에 맞추기엔 제가 그만한 여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느 순간 유선공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아주 기가 막히게 3개월 주기에 맞춰 새 노트를 사게 됩니다. 쓰다만 노트들이 쌓여있는 걸 바라보면서 나에 대한 실망감이 우울감으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매일, 꾸준히, 그리고 이쁘게 쓰는 유튜버, 인플루언서들을 보면 난 왜 이렇게 나약하고 의지박약인 걸까, 매년 다른 기록법을 찾아보면서 자기 계발 책을 읽어도 기록을 꾸준히 하는 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기록의 목적이 노트 하나를 온전히 다 쓰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 또한 이루어지지 못했죠. 


    내가 동경하는 그들처럼 기록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 나도 기록을 해서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거나, 새로운 일에 성공하고 싶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기록의 목적은 무엇일까, 걸음마도 떼기 전에 달릴 거를 바라보니 기대하고 실망할 수밖에요. 저에게 기록이 필요한 이유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고, 또 기록을 할 때의 좋은 점은 생각을 비워내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과 글이 속 안에 쌓일 때 병이 나는 저였습니다. 무기력감이 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조건 써내는 걸 목표로 바꿨습니다. 생각의 양도 많고 속도도 빠른 저를 따라올 수 있는 건 키보드 타자로 치는 수밖에 없었기에 노트어플 '업노트'에 그저 써내려갑니다. 손글씨의 꾹꾹 눌러쓰는 감성, 펜과 종이가 닿으면서 그리는 그 촉감을 좋아하고 고집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을 따라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각자의 목적과 상황에 맞는 기록법이 존재하고 지금의 저는 이 방법이 제 기록의 목적과 맞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조금 아쉽긴 합니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이어리를 구경하면 쓰지도 않은데 괜히 사게 될까 봐 구경조차 안 했습니다. 다이어리를 안 사서 그런지 새해라는 확 와닿지는 않네요. 새해 같지 않은 새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겐 새해는 3월부터


    2024년입니다. 새해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서로 새해 복과 건강을 빌어줍니다. 뭔가 작년과는 느껴지는 게 다르더라고요. 약간 무덤덤하달까요.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새해인데, 새해 같지 않아. 이~상하네"

 남편이 대답합니다. 

    "나도 그래,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은 퇴사날이 기준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새해=새로운 시작에 설렘 가득했었는데, 퇴사=새로운 시작이니 새해가 덜 설렐 수밖에요. 이방인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둥실둥실 열기구를 탄 기분이 들던 그동안의 새해가 그립기도 합니다.(열기구를 탄 적은 없습니다ㅎ). 59일 남은 저희만의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 퇴사 준비, 떠날 준비 착실히 하면서 지내봐야겠습니다. 


    이 친구들이 잘 하고있나, 진짜 퇴사하나, 진짜 떠나나,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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