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주재원 사회에서 살아가기
얼마 전 아이 학교 일 때문에 한국 엄마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원래 알고 지내던 엄마들도 있었지만 처음 얼굴을 본 엄마들도 있어 다 함께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OOO 엄마 OOO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편들의 회사 이름과 사는 곳을 공개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각 회사별 주재원 혜택으로 옮겨 갔다. 어디는 통학 버스비 지원이 되고, 어디는 부식 컨테이너가 오고 등등... 약 두 시간 정도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이런 관계가 익숙하지 않다.
내 이름 석자보다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삶,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남편이 하는 일을 소개하는 삶, 나로부터 시작된 인간관계가 아닌 남편과 아이로부터 시작된 인간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삶. 내가 원치 않아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경제적인 것들까지 까발려져야 하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나의 처지를 남과 비교하게 되는 못나고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 종종 얻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주재원 아내의 삶인 것을.
1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인도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이런 인간관계는 적어도 내 계산 속엔 없었다. 설사 예상했다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싶지만 아직 이곳에 온 지 6개월 밖에 안된 지금, 나의 자아는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아내보다는 내 이름 석자 쪽에 더 가깝게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인도에 처음 왔을 때 알게 된 언니 한 분이 나에게 이곳에서는 늘 말조심, 행동 조심하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주재원이 많은 사회라 어느 회사의 누구 하면 다 알게 되고, 주재원이 많다 해도 워낙 좁은 한인 사회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이니 누군가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남 얘기 자체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말이다. "아, 나 그 사람 어디 갔다가 봤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 말이 돌고 돌아 그 사람 귀에 들어갔을 땐 마치 내가 뒷말한 것처럼 되는 상황이 많다는 것이다. 말조심, 행동 조심은 기본값이고 나는 여기에 더해 마음 조심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한국에 있을 땐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가족 외에 내 인간관계는 직장 동료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육아 때문에 만날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 수다를 떨고 서로 위로할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을 만났을 땐 내가 하는 일 얘기, 요즘 보는 드라마 얘기, 요즘 읽는 책 얘기 등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모든 인간관계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누구, 아이를 통해 알게 된 누구 엄마이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나의 가족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나도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고 상처를 받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비교하고 마음 상하는 일도 분명히 생길 것이다. 속상한 마음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털어놓기도 힘들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폭풍을 오롯이 겪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은 그 경험들에 내 감정이 지배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조심해서 다독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까지 사람을 사귀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사귀긴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긴 주재 생활이 너무 외로울 테니까. 이곳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큰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 또한 주재 생활의 소득이지 싶다. 직장 생활하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봤기에 멘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인생은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다.
오늘따라 내가 미련 없이 떨치고 온 한국의 삶, 그곳에 두고 온 인연들이 그립다. 그래서 예전에 일했던 사진을 한참 뒤적이다가 문득 떠오른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 명은 유럽에서 나와 같은 주재원 아내의 삶을 살고 있는 선배,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아이 친구 엄마로 만났지만 이제는 내 친구이고 언니 같은 사람이다. 한국에 내가 계속 살았다면 지금쯤 쓰러져 자느라 아마 메시지 따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곳에 온 게 감사하기도 하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한 다행이다. 그렇게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 마음을 전할 누군가를 두었다는 게. 한국에서도 좋은 인연들을 만났으니 이곳에서도 누군가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살짝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