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더웠던 기억

by 사라의 여백

여름, 그 더웠던

유년시절 나는 겨울보다 여름나기가 더 힘들었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여름 징역살이를 읽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감옥의 여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여름 징역살이는 옆 사람을 증오하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에 차라리 겨울이 낫다고, 책에는 여름 징역살이를 가리켜 형벌 중의 형벌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여름나기가 겨울보다 낫다고들 하지만, 틀린 말이라고 조목조목 증거를 들이대지 못할 만큼 일리가 있는 소리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여름은 지옥이란 말도 절대 반박불가다. 박빙의 결투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사형수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님이 쓴 글이었다. 그 어머니는 사형수인 아들이 형을 살던 감옥 근처에다 방을 얻어놓고 살았다. 한겨울에도 방에 불기를 들이지 않았다. 난방이 안 되는 차가운 감옥을 견뎌야 하는 아들에 대한 모성애였다. 그 어머니도 나처럼 ‘여름 징역살이’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살인적인 추위와 살인적인 더위 – 어느 것이 더 살인적인가? 추위는 사람을 얼어죽게 만든다. 추위는 사람을 죽일 만큼 힘이 세고 더위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더위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살인을 저지르는 교활한 지능범이다. 추위보다 더위가 더 강하다는 사실은 이솝우화에서도 이미 증명되었다. 매서운 바람이 벗기지 못한 외투를 햇님이 벗겨내지 않았는가.


슬레이트 지붕과 변소의 기억

온종일 불볕더위를 머리에 이고 욕심껏 달궈지던 슬레이트 지붕은 오후가 되면 그 열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마침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내 품고 있던 독한 열기를 방 안에 게워냈다. 방 안에 들어 있던 모든 것들은 더위를 먹었다. 선풍기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신 더운 바람을 뱉어냈다. 토해내는 것들의 냄새가 더 고약한 것처럼, 한번 물었다가 뱉어내는 더위도 원래보다 더 지독했다.

시원한 바람을 내놓지 않는 선풍기를 원망하며 탁 소리와 함께 스위치를 끄고 나면 이내 다시 스위치를 누르고 만다. ‘바람’보다 ‘소리’가 더 큰 일을 해내고 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실, 비록 텁텁한 바람일지라도 그 앞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지는 않는다. 기대만큼 시원하지 않을 뿐이다. 선풍기를 잠시라도 꺼 보면 안다. 물 먹은 솜처럼 답답한 공기,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 나 있는 수백만 개의 땀구멍 마다마다에서 베어 나오는 땀. 선풍기가 쉼 없는 중노동에 시달렸던 이유다.

마당 한쪽에 있던 재래식 변소에서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 냄새는 날이 더울 때 더 심했다. 사돈네와 뒷간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는 말이 결코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내 코가 증명한다. –사돈네는 아직 경험 전이다–. 재래식 변소 안에는 절대 발을 헛디뎌서는 안 되는 구멍 뚫린 사각지대가 있었다. 그 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뚜껑이 덮여 있고, 가운데쯤에 손잡이 용도의 막대기가 얌전히 얹혀 있었다. 냄새를 차단하는 목적이었다면 실패작이었다.

더운 여름, 마루나 마당에서 밥을 먹는 일이 흔하던 시절에 엄마는 저녁 밥상을 방 안에 차리셨다. 나는 엄마도 나처럼 그 변소 냄새에 적응하기 힘드셨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해,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가난한 밥상을 이웃에게 들키기 싫어서였다는 대답을 하셨다. 한 마당을 두 가족이 함께 쓰는 집에 살던 때였다. 한여름에 방 안에 밥상을 차렸던 이유가 변소 냄새 때문이 아니라 ‘걸인의 찬’이었던 엄마의 이유. 어떤 이유였던 가난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분수였다.

나에게 있어서 유년의 여름은 숨 막히는 더위와 변소 냄새의 기억이 맨 앞줄이다. 나는 지금도 재래식 변소에서 쩔쩔매는 꿈을 가끔 꾼다. 똥꿈이 길몽이라는 위안은 꿈에서 깨고 난 후의 일이고, 꿈속에서는 정말 끔찍하고 아찔한 똥의 꿈일 뿐이다.


가난의 이중 고통과 소환

헐벗고 배를 곯거나, 학교 대신 공장에 다니며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던 가난은 아니었다. 간신히 체면 선만 사수하는 가난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고 필요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가난, 게다가 이런 사실을 들킬 수 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자꾸만 화가 났었다. 나를 화나게 했던 가난은 주로 여름에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왔다. 어쨌든 가난의 이중 고통이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시절이어서 ‘우리의 가난’이 유별나게 도드라지지 않았던 점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절대다수가 가난했다는 사실이 가난의 불편함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다만 상대적 빈곤감을 덜 느끼게 했을 수는 있다.

가난했던 과거의 일들이 지금도 낱낱이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저질의 기억력과 무관한 모양이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행복, 가난해서 행복했던 일도 제법 있다. 이건 감사까지는 아니래도 다행스럽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정도 공평함은 있어야 그래도 세상이 살만하다는 억지가 좀 먹히지 않겠는가.

지금 나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집,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물과 찬물이 콸콸 쏟아지고 냉장고에는 얼음이 항상 대기 중인 집에서 살고 있다. 물론 이제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하고 시시해져버린 일이 나를 덜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더 이상 ‘변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는 화장실은 코를 쥐어틀게 만들던 신분에서 벗어나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동시에 내장을 비워낼 수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 환상적이지 않은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의 괴담으로 어린 나를 벌벌 떨게 했던 변소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바깥보다 더 더웠던 방,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그 안에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순간들이 이제는 ‘옛말’이라는 이름표를 펄럭이며 박물관 사진으로나 만나는 세상을 맞았다.

나는 가끔씩 내가 겪었던 가난을 소환한다. 더 채우고 싶은 욕망과 더 누리고 싶은 갈망이 꿈틀거릴 때이다. 소환된 가난은 가진 것이 적다는 불평과 하다 더 보태려는 욕심을 지긋이 내리누르고 승리한다. 나는 혹독한 여름더위 덕분에 부자의 기준을 낮췄고, 유년 시절의 가난 덕분에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방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