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
미쿡살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그동안 자동차로만 다녔던 맨하탄을 향해, 네 명의 촌 아낙들이 출항에 나섰다. 양 어깨에 국뽕을 빵빵하게 넣고, 뮤지컬 ’maybe happy ending’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 동이 트는 붉은 하늘 기운이 새벽 기차 안으로 스며들고, 한 폭의 뿌연 수채화는 기차 유리창을 채우며 스쳐갔다. 펼쳐지는 바깥 장면에 환호하는 아낙들의 양 볼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찌나 귀엽든지.
뮤지컬 시작 전, 여유로운 시간에 밀랍박물관을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한때 뉴요커였던 시절 이 밀랍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는데, 기억을 더듬어 세월을 짚어보니 25년 전의 일이다. 흘러간 세월은 박물관 안에 들어간 후에 제대로 실감되었다. 실내 구조가 변경된 것은 물론이고 밀랍되어 있는 작품들이 거의 다 바뀌어 있었다. 딱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은 ‘간디’였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뮤지컬 감상은 생략해야겠다. 토니상을 6개나 받은 작품을 두고, 내 입이나 손가락으로 왈가왈부 하기엔 자격미달이다. 다만, 전미도가 클레어라는 주인공을 맡은 한국 뮤지컬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바램이 생겨났다. 원래 우리 꺼니까! 그래도 이 사실 하나는 말해야겠다. 대사는 물론 영어였지만 이야기의 무대가 서울과 제주도라 반가운 한글 간판이 보였다. 꽃화분의 이름을 그냥 ‘화분’이라는 한글로 불렀는데, 이유없이 좋았다. 이것도 국뽕이다!
넉넉하게 남은 귀가 기차 시간 덕분에 극장 앞에서 주인공들을 기다렸다. 공연이 끝난 후에 관객들을 위해 밖으로 나와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에 우리도 참여했다. 젊어서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고 있는 아낙들의 볼이 또 붉어졌다. 다시 봐도 귀여웠다.
남은 시간은 주로 맨하탄 바닥을 누비는 데 썼다.버스킹 공연도 보고, 브레이크 댄스, 그리고 뉴욕의 명물인 베이글 집에도 들렀다. 이거저거 마구마구 촌티 팍팍 내며 싸돌아다녔다. 사진도 엄청 찍어댔다. 의도치 않게 내가 사진기사 역할을 맡았는데, 아무도 청하지 않았던 일이다. 늙어가는 자신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는 아낙들은 사진 찍히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 그럴싸한 곳에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아낙들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지 싶다.
돌아오는 기차 안은 붐볐다. 출발할 때 나란히 나란히 앉았던 것과 달리 각각 따로 앉아야 했다. 고단했던 아낙들은 조용히 가수면 상태에 빠진 것 같았고, 나는 찍어온 사진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사진 속의 한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사진을 크게 찢어(키워) 그윽하게 바라봤다. 흘러간 시간이 여인의 얼굴에 찐득하게 묻어있다. 낯설지만 친숙한 얼굴이다. 살아온 날들 중에서 가장 늙었지만, 살아갈 날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모습이다.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날들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살아갈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 마음 때문이었을까? 내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자뻑, 맞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 이 구절은 기차를 타기 전날 하루 종일 입안에 뱅뱅 돌던 노래다.
다 늙어 설레는 날도 있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