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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S Aug 22. 2020

과일 가득 브런치와 미지근한 라임 녹차

새콤달콤 짭조름 사각 바삭 작은 행복의 맛.

아주아주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갔다가, 가판에 가득가득 쌓인 자몽을 발견했습니다. 보통은 먹기 쉽게 오렌지나 귤을 사 오는 편인데 참 이상하게 자꾸만 자몽에 눈이 갔어요. 그러고 보니 카페를 예전처럼 쉬이 들르지 못하게 된 요즘, 자몽을 먹은 일이 까마득한 거예요.


흠, 어떻게 먹는 게 제일 쉽나, 하고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다가 먹는 방법은 둘째치고 맞아, 자몽 색이 이렇게나 예뻤지 하는 깨달음만 얻었어요.


결국 돌아와 장바구니를 풀어보니 자몽 하나, 라임 하나가 덜렁, 딸랑 따라와 있었습니다. 청을 담으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한 묶음씩 샀을 것을 그냥 사보고는 싶고 어찌 먹을진 모르겠으니 에라- 하고 꼭 하나씩만 담았던 것 같아요. 그러곤 앗! 국거리 고기가 싸다, 잡곡을 좀 살까- 하면서 잊어버린 거죠.  


냉장고 야채칸 한편에, 노랗고 푸릇한 이국적 과일을 꼴랑 두 개 넣어두면서 어쩌면 약간은 싱그러운 기분이 되었던 것도 같아요. 마스크를 벗어던지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은 집안뿐이라는 사실이 뾰족한 어떤 것이 되어 마음을 꾸욱 눌러오는 요즘, 이런 동글동글한 사치가 행복이 되어주기도 하네요.


다음 날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보리차 물병을 꺼내는데 자몽과 라임 생각이 나더라고요. 새콤하고 달콤하게 오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자몽은 본디 쓴 맛이 있어서 보통은 청을 담아 먹곤 하죠. 우리는 그냥 이대로 먹기로 해요. 비타민도 그대로 섭취하고 무엇보다 편하잖아요? :) 아침은 간편하게!


청을 담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쉽지 않아요.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전 누군가 과일청이나 수제잼을 제게 선물로 줄 때면 그렇게 마음이 찡해옵니다. 과일을 살뜰히 씻고 조각조각 자르고 유리병을 삶고 설탕을 조심히 부어 그의 마음과 함께 꾹꾹 눌러 담았을 테죠. 예쁜 과일 색이 우러나오면 받을 이의 마음도 하루도 이렇게 청량한 색으로 물들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자몽 껍질은 그냥 박박 요령도 없이 벗겼고 라임도 씻어 슬슬 잘라줬어요. 얇게 얇게 자르고 싶었는데 요령이 없는 탓에 숭덩숭덩 투박해진 것도 같아요.


바나나랑 사과는 아무리 금값이 되어도 항상 집에 상비해두는 과일입니다. 어떻게 먹어도 실패할 일이 없는, 든든한 뒷배 같은 느낌이잖아요. 먹기 편하게 잘라 가득 담아봤어요.

베이컨 두장을 팬에 올리고 위에 간 마늘을 소스처럼 얹어 강불로 구워요. 항상 아는 그 맛이 질릴 때면 향신료를 쓰는 게 정답일 터인데, 간 마늘만큼 편하고 흔한 향신료도 없으리란 생각이었습니다.

팬이 어느 정도 달궈지면 불을 중불로 줄이고 베이컨에서 나온 기름을 한쪽으로 몰아 계란도 부쳐주세요.

전 언제쯤 예쁜 반숙 프라이를 할 수 있을지, 이번 생에선 안될지도 모르겠네요.

토스터가 있다면 호밀빵을 바삭하게 구워주세요. 전 입천장이 까지는 느낌을 싫어해 원래 바삭하게 잘 굽지 않는데, 과일이 많은 접시라 금세 눅눅해질 것 같아 바삭하게 구워봤어요.

꼭 굽지 않아도 좋죠. 말랑하고 촉촉하게, 그렇게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못생겨서 왠지 더 맛있어 보이는 프라이, 마늘 향이 알싸한 베이컨 두장 그리고 토스트만 있으면 여느 카페 부럽지 않은 브런치 메뉴 완성.


전날 저녁으로 먹고 남은 참치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같이 담고 나니 접시 위는 뭐랄까... 섬유질과 단백질의 싸움 현장 같아졌네요.


아직도 찬장에 한참 남은 오렌지 잼을 바나나 위에 듬뿍 올려주고 완성입니다.

오늘의 음료는 뭘로 하시겠어요?

이리저리 선반을 뒤지니 현미녹차가 하나 툭 떨어지네요.

차가운 과일이 주 메뉴로 나오는 만큼, 저는 녹찻물을 미지근하게 우려내 라임을 썰어 넣고 마셔보기로 합니다.

녹차와 라임이 꽤나 어울리는 맛이라는 거, 미지근해도 아주 상큼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물론 차가운 음료를 좋아하는 제 친구 중 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난 얼음을 넣어야겠어’ 합니다.

키친타월 한 장 북 뜯어 나이프랑 포크를 돌돌 말아둔 건 순전히 ‘어디서 본 건 있어서’입니다.

이렇게 차려두고 아침을 먹으며 잠깐 읽을 책을 고르러 다녀오면 마치 누군가 내가 주문했던 브런치와 티 한잔을 마법처럼 테이블에 세팅해준 느낌이 들어요.


라임이 들어간 녹차 향이 기분을 동동 띄워주고 쨍한 자몽 색에 눈이 즐거워지는 하루의 시작.

나를 잘 먹이고 다독이는 일은 중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찾아 나에게 대접하는 일은 소중합니다. 심리학자 한분이 유튜브에서 그러셨어요. 행복은 양이 아니라 빈도가 중요한 것이라고요.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고요. 한 번에 꼭 100을 모두 채워 행복해야 할 필요는 없대요.


저는 오늘 제게 주문한 이 브런치를 만들면서 10만큼 행복했고, 그렇게 나를 대접해 또 10만큼 더 행복했습니다. 음료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나면 이 행복은 멈추겠지만, 내일 어디선가 제게로 흘러들어올 행복들의 물꼬가 되어줄 것으로 믿습니다. 어제의 크고 작은 행복 두 알이 오늘의 제게 기대감을 주었듯이요.

무슨 일이 있을까요, 또 오늘 하루는. 우리 아프지 말고, 남을 아프게도 하지 말아요.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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