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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Aug 22. 2021

Sarah in the city

미드나잇 인 홍콩(MIDNIGHT IN IN HONGKONG)

  5년 전. 대학원 졸업 후 첫 임용고시를 끝내고 나는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상을 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너,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회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인도네시아에 방문하는 일정을 잡았는데도 거긴 쏙 빠지고 혼자 여행을 계획했다. 그동안 고생하고 살았는데 잠깐 쉬는 겨울방학을 애들 뒤치다꺼리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가본 동남아 나라 중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말레이시아로 목적지를 정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따라 함께 출국하는 리틀 시스터도 모르게 조용히 말레이시아 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열심히 출국 준비를 도와 그들을 보내고 며칠 후, 나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혼자 즐기는 여유를 꿈꾸면서.


  당시 내가 찾은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제일 괜찮은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하는 캐세이퍼시픽이었다. 갈 때는 약 2시간 정도, 돌아올 때는 10시간 정도를 대기해야 하는 비행편이었다. 캐세이로 비행편이 정해지면서 실은 마음이 더 들떴다. 팬심으로 시작해 동경 반, 좋아하는 감정 반을 갖게 한 대상인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가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지도 벌써 1년.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난 여유를 즐겼다. KLCC 공원 트윈타워 분수대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반나절을 죽치고 앉아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잘란알로 시장 좌판에서 망고스틴 한 봉지를 사서 그 자리에 앉아 까먹기도 했다. 평소의 나라면 웬만해선 하지 않는 것들을 그곳에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쿠알라룸푸르에서 떠나기 전, 먼저 연락을 했다. 내가 거기에 간다고, 시간 있으면 만나자고. 생각보다 그는 쉽게 수락해주었고 그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처럼 우리는 그저 저녁을 먹었고 함께 시간을 보낸 것 뿐이었다. 게다가 헤어질 때 그는 다음 일정에, 나는 출국 시간에 쫓겨 서둘러 트램을 잡아타며 황망히 헤어졌다. 차라리 그곳에 하루 더 머물렀다면. 그랬담 달라졌을까.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나는 돌아왔다. 나중에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된 리틀 시스터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고 그때의 일탈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 휴가를 맞아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다. 여행 예습을 위해 <중경삼림>과 <아비정전>을 다시 봤다. 양조위를 따라 다니던 왕페이, 장만옥의 전화를 기다리던 유덕화가 다시 보였다. 그들처럼 나도 그때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간다면 그때 그저 접어 두었던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고 오리라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곳에 남겨두고 오리라 생각했다.

  다시 만난 그곳은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였다. 일단 잦은 시위로 도시의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자영업자들도 시위에 동참하게 되면서 상점들은 오후 3시를 기점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작은 가게들은 물론이고 유명 프랜차이즈 매장과 큰 쇼핑몰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더위에 헉헉대며 찾아간 스타벅스 컨셉스토어에서도 포스를 닫아 결제가 불가능하다며 우릴 받아주지 않았다. 쇼핑 거리 벽면은 사람들이 붙여둔 포스트잇과 유인물들로 가득했다. 강남역 사건과 미투 고발로 나붙었던 포스트잇을 상기시키는 모습이었다. 별들이 소곤댄다 노래했던 밤 거리는 넘치는 인파로 가득해야 했지만 이상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직접 시위대를 마주할 일은 없었기에 다행이었지만 5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의 그곳은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다만 본연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했던 장소들이 있었다. 5년 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가지고 간 할인 티켓을 사용할 수 없어 가보지 못하고 통곡의 벽으로 남았던 피크 전망대가 바로 그 중 하나였다. 날씨는 무더웠지만 하늘은 깨끗해서 그곳 최고의 자랑이라는 야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옛날 굳이 이 위까지 올라와 살겠다고 여기까지 트램길을 뚫어 놓은 영국인들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또 다른 하나는 항구를 오가는 페리와 더운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트램이었다. 호주에서 제일 좋아했던 것 중에 하나였던 페리와 트램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 또 봐도 반가웠다.    

  그 반가운 마음에 나는 다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은 지 이제 막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곳의 반가운 모습들을 보니 그냥 생각이 났다. 내게도 반가우면 그에게도 반가울 테니. 드라마처럼 극적인 반전을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에겐 나의 존재와 연락이 생각보다 그렇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5년 전 그때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 


  혼자만의 생각과 복기, 세세한 의미 부여와 주변 사람들의 조언들. 그걸로 상대의 행동과 말을 해석하며 그 어간에 있는 비언어적 의미들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나 그가 나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면 그저 그뿐이다. 그동안의 나의 모든 노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 여전한 평행선 위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항상 같은 얼굴, 같은 태도였던 것 같다. 나는 왜 이제서야 그걸 실감하게 된 걸까. 


  <아비정전>에서 수리진(장만옥)은 아비(장국영)가 찰나의 순간,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결국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은 없었단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떠난다. 그렇지만 그녀가 한참을 걸어가 다다른 곳은 늘 그의 집 앞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경찰관(유덕화)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그곳에 발길을 끊게 된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수리진의 산책과 같은 시간이었다. 몇 번이고 이 평행선을 확인했으면서도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곤 했던 나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도 흘러간 시간 만큼의 변화된 얼굴을 나타내는 그곳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젠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을 떠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났다. 다시 그곳에 내 의지로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만나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여행지는 지나간 시간만큼 그 얼굴을 바꾸어 보여주었다. 올해 무더운 격동의 여름이 지나고 나면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겠지. 그러나 영국령이었을 때도, 중국령일 때도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나도 그렇다. 이젠 그때와는 다르게 마음을 먹을 수 있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키워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때와 같은 얼굴도, 그리고 그 시간만큼 변한 나의 얼굴도 모두 나니까. 


  이제서야 마음 정리를 위한 산책을 끝낸 것이 며칠은 후회스러웠다. 말은 아니라고 했으면서도 왜 지지부진 혼자 지금까지 시간만 끌었을까 싶어서. 그치만 내게는 그 정도의 산책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시간까지도 모두 나인 것을. 내가 나인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크 전망대에서 봤던 반짝이는 많은 불빛들처럼 지난 나의 날들도 그만의 반짝임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이 없으니. 

  이제 나는 러브 라이프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앞에 두게 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새로운 선택을 해보려 한다. 나대로, 나만의, 나다운 선택. 지금까지의 경험을 거울 삼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미련을 두지 않는 것도 큰 변화일 수 있단 걸 다시 깨달으며. 그렇게 다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보려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전의 사건을 기대하면서. 


_ '19 SUMMER 홍콩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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