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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Aug 22. 2021

City of Today

리얼 뉴노멀

  4월까지만 해도 그렇게 최악은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 했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했다. 8월 삼복더위에도 마스크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짧은 2주간의 방학을 마치고서 새로 맞는 2학기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했건만 개학 이틀만에 학교는 다시 원격수업으로 전환했다. 거리두기는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는 거의 3단계에 준하는 강도로 시행되고 있다. 방역 수칙을 지켜 모이던 예배와 교회 모임들도 중지되었다. 다시 3월처럼 가정 예배와 온라인 모임으로 전환하여 진행중이다. 야구도 다시 카카오프렌즈 인형 관중들과 함께 경기를 치른다. 앞으로 며칠간은 아침에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픽업하려면 매장에 들어가서 출입명부를 작성하고 받아가야 한단다. 여름을 맞아 휴가도 떠나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는 잠깐의 외출을 이제는 좀 더 편하게 누려볼까 했는데 당분간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렸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꿨을 때가 있었다. 이 시기만 지나가면 다시 봄과 여름을 원래 누리던 그때처럼 만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서울이 아닌 별들이 소근대지는 않았으나 야경이 아름다웠던 마카오와 홍콩에서 여름밤을 즐겼고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사적 대인접촉 자제를 촉구하는 이 마당에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지.

  

  코로나 19가 가져온 뉴노멀 시대. 그러나 뉴노멀은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저성장, 저소비, 높은 실업률, 고위험, 규제강화, 미 경제 역할 축소 등이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줄곧 뉴노멀로 논의되던 것들이었다. 면접의 기회조차 잡기 어려운 고용 상황과 밀려드는 실업급여 신청자들. 티끌 모아봐야 티끌이고 티끌을 쓰면 태산이 되는 반비례 그래프. 영혼까지 끌어와 아무리 열심히 살아 보아도 개천에서 용나기는 고사하고 머리 누일 곳 하나 마련할 수 없게 하는 경제적 격차가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당첨 가능한 수준의 기본 청약 가점을 채우려면 외벌이에 셋 이상의 다자녀, 양가 부모님을 모시는 무주택자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느 팟캐스트에서 들었다.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대체! 어느 때보다 복지에 열을 올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어 클릭을 하고 싶어도 체크할 박스가 없다. 말 그대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건보료는 또 오른다고 한다. 물론 나의 건강을 위한 보험이라지만 정말 '나만을' 위한 게 맞을까. 


  구태하고 부패한 세력을 몰아내는 심판에 앞장서며 새물결이라 자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게 나라냐' 외쳤던 그들의 현재는 어떤가. 연이어 터지는 사건과 이슈들을 보면 당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이념과 가치로 외피를 두른 전통주의는 반대편에 자리하여 새물결이 드러낸 치부를 공격의 무기로 삼는다. 그러나 진정한 '전통'의 가치는 실재하는가. 그 '전통'의 가치를 드러내려거든 더욱 고상하고 무게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전통주의는 광적인 그 무언가에 지나지 않아 많은 이들의 외면을 받는다. 양 극단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수호하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의 소리 높인 외침은 그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진정 그 무엇을 대변하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했던 뉴노멀에 <삼시세끼>의 "강력ㅎF"처럼 부채질을 한 것이 온누리에 도사린 코로나 19 감염의 공포였다. 이런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동년배이면서 비슷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친구들은 다들 학업과 시험에 매진하는 중이다. 그것은 고정 수입과 사회적 안정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지금이라도 패닉바잉에 편승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서울은 고사하고 수도권 외곽도 아닌, 대한민국 그 어디에라도. 땅바닥에 붙어 있지도 않는데 저 공중에 있는 시멘트 덩어리 값이 내가 평생 벌어도 모자르다 하니. 나 참. 내가 먹고 자는 현장이지만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는 공간을 위해 정녕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하는 것일까. 현실의 파고는 날로 거세어질테니 표류하는 부표가 되기 보단 빨리 닻을 만들어 어디에라도 내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되리라. 

  카오스의 연속인 2020년의 시곗바늘은 이제 절반 이상을 지났다. 지금까지 사람들과 모여서 나누는 대부분의 주제는 모두 위에서 말한 것들이었다. 나도 그 가운데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돈을 벌려면 종잣돈을 빨리 만들어 주식을 사야 하는구나, 복지 노래를 부르더니만 월급은 그대로고 세금만 왕창 뛰네, 이제 집 사기는 글러 먹었구만, 삼십대가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시험 준비를 해봐야 하나. 정말 그래야할까. 그 자리에서 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던가.


  지난 한 달 반 동안 아침 묵상 시간에 이사야서의 절반인 39장까지를 읽었다. 약간 왔다갔다 하는 느낌에 도대체 무얼 말씀하시고 싶은건가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하나님이 하루는 구원을 가져오시는 개선장군 이었다가 다음날은 환난과 징벌의 칼을 사정 없이 휘두르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군대장관의 모습이셨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여전히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망할거란 예언이 임한다. 종국에 그리 다 망할 일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단 예언은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다. 이사야를 통해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들었을까. 정말 알고 싶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론 둘 다 맞는 말인건 알겠는데 도대체 지금의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

  이사야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강대국들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초반에 언급되는 유다의 아하스 왕은 하나님 대신 앗수르를 선택함으로 그분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반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던 히스기야가 등장한다. 그 역시 아하스와 같은 유혹을 받았다. 앗수르의 사자들이 유다 땅으로 와서 현재 그들의 승승장구하는 승전 소식과 함께 현왕인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 정신을 쏙 빼도록 선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하실거라 너네 왕은 말한다지?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도 너희 그렇게 가만히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있겠어?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됐는지 너희도 다 들어서 알잖아. 그 많은 나라들의 백성들과 왕들이 지금 다 어디에 있냐고! 다 망했잖아, 우리 앗수르에게!! 여호와가 구하신다고? 그 말에 속지마. 너희도 결국엔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될거야!] 


  히스기야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송사를 모두 그분 앞에 쏟아내며 이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한다. 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18만 5천 대군을 단번에 처단하신다. 이스라엘 군대가 적군과 제대로 붙어보기도 전에, 하룻밤 새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가 됐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자신임을 온 세상에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사건이었다.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늘 상기시킨다. 아니, 실은 그 이상이다.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실감하게 만들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러니 불안과 초조의 강도는 더욱 거세지고 안 그래도 흔들흔들하던 마음은 더 요동을 치게 된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가본다 한들 나는 이미 한참 늦었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이사야서를 통한 교훈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희망은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를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불안의 세상이 우리를 잠식하려 그 기세를 뻗쳐올 때, 그분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한다. 그들에게 속는 것을 멈출 수 있다. 망한다 말하지만 망하는 건 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삐끗하는 게 사람이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가 무릎으로 간구하여 강성함을 얻었던 히스기야도 마지막엔 실수를 한다. 자신의 강성함이 정말 자신으로부터 왔단 자만에 빠져 바벨론에게 궁정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자랑한다. 사실 그들은 그걸 빼앗으러 올 자들이었는데 말이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만사형통이 자기 때문이라 착각하는 그런 존재. 


  오늘은 그분을 따라 살겠다며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그 파도 위를 서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면 그 호기로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편이 되겠다 단정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매일 내가 할 일은 완벽하지 않은 나를 알고 인정하여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 뿐이다. 뉴노멀은 다른 게 아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협해왔던 것들이 모습을 조금 변형된 모습을 취했을 뿐이었다.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가진 것을, 특히 나의 믿음을 자만하지 않고 끝도 없는 불안으로 침잠하게 되는 그때. 건져 주시길 구하는 무릎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 그것이 리얼 뉴노멀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Oh, LORD. Please save me, every single day.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Acts 17:28



_ '20 AUTU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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