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리 Aug 22. 2021

City of Today

서툰 어른이

  <미운 우리 새끼>라는 예능 프로가 있다. 출연자는 대부분 30대 후반부터 40대 연령대의 미혼 남성들이다. 방송은 출연자들의 일상을 돌아가며 보여주는 형식이다. 출연자들은 여전히 철이 덜 든 것 같이 부족하고 서툰 모습들을 보인다. 요리를 잘 못 한다던가, 엉뚱한 장난과 실수들을 보여주며 웃음을 준다. 엄마들의 염려와 걱정 섞인 핀잔은 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프로그램이 조금 불편했다. 유명인으로 나름 자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그저 미혼이라는 이유만으로 뭔가 어린 애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것일 수도 있었(그걸 보면서 큭큭대는 나를 발견하긴 했으니까)겠지. 그렇지만 사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내일 모레면 40인데 난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그들처럼 기행을 일삼았다거나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어떤 것에 서툰가. 나의 서툰 점을 꼽아 보려면 먼저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작년에 일하던 학교에서 아침 등교지도 업무를 맡아 일찍 가서 학교 주차장 입구에 늘 서있어야 했다. 덕분에 학교 출입자들의 차종을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그 중 육아 휴직을 끝내고 1학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복직한 선생님이 있었는데 복직 첫 날 하얀색 BMW X7을 타고 들어왔다. 어느 날은 뚜껑 열리는 벤츠를 타고 오기도 했다. 자기 집이 부잔지, 남편이 부잔지, 남편 집안이 부잔지 암튼 그 이유가 위의 셋 중 하나여서 그렇다고 들었다. 그렇게 복직 후 한 서너달을 더 다니다가 돌연 퇴직을 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단다. 당시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 사람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었다 싶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실천한 사람이었으니까.     

  자기 원하는 대로만 해서 후에 남은 뒷일을 다른 사람들의 책임으로 남겨두고 먹튀한 것 같은 그 선생님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가 어찌 안 힘들겠냐만은 그렇다고 그만두다니. 양도 가능한 거라면 그 자리 내게 주시오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까지 그 사람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에겐 자신의 원함이 그 무엇보다 훨씬 크고 강하게 작용했던 게 아니었을까. 나 같았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로 생각하고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했겠지.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고 미덕이라 해도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그 선생님에 대한 얘기가 전해질 때마다 보통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냐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냐고, 그렇게 부자라서 맘 편히 그만둬 버릴 수 있어서 좋겠다 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나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숨기려고 노력했다,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는 안 그런 척, 늘 좋은 사람, 편안한 상대인 척 했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이 휴직 후 퇴직의 그 선생님을 두고 빈정대고 내 처지와 비교하며 초라해했던 건 사실이었다. 나의 아집과 교만과 자격지심이 모든 상황과 사건에 작용하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껏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난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굉장히 서툰 게 맞았다. 그걸 말해서 문제를 일으키기 보단 좋은 게 좋은 편이 낫고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극도로 싫어하는 상황을 웬만하면 만들고 싶지가 않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건 내가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럴바엔 그냥 내가 먼지처럼 그 상황에서 사라져 버리고만 싶다. 그러나 정말 내가 그런가. 정말 난 좋은 게 좋은 사람이기만 하던가. 

  출세욕을 다룬 먼슬리에세이 시즌 1의 두 번째 책을 쓴 이주윤 작가는 솔직하게 쓰는 글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 책들과 그걸 쓴 작가들을 끝없이 평가하고 나와 견주는 자신에 대한 단상을 한 챕터에서 줄줄이 풀어 놓았다. 비열하려면 끝까지 비열할 것이지 줏대 없이 스스로를 꾸짖고야 만다는 말은 나를 쿡 찔렀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어쩜 나랑 이렇게 똑같지 생각했다. 외국 사진 사이트에서 볼 법한 사진에 몇 문장 써서 인스타에 포스팅한 것 같은 글을 모아 낸 책들이 요즘 소위 잘 나간다는 책들인지라 나도 그걸 보면서 와 요즘 사람들 진짜 책을 제대로 안 읽는구나, 이런 책이 잘 나간다니 어쩜 좋냐 그러면서 통탄해했거든. 그래놓고 그러는 넌 뭐가 잘났냐 탄식을 하고. 글에서도, 삶에서도 비열함은 그대로 둔 채로 모호한 말과 표현으로 그것들을 가리고서 난 멋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만 싶었다. 나는 솔직하고 싶지만 절대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아이디어를 준 친구 H는 어느 날 출근길에 나는 아직 어른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다가 근데 지금 이 나이에 어른 아니면 난 뭐야! 했단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그저 다 서툰 어른이들 아니겠냐 말해주었다. 그렇다. 내가 시금치 싫어, 당근 싫어 를 외칠 수 있는 어린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그저 와르르 토해낼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일 모레 마흔인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래서 내 안엔 세상 졸렬한 ‘나’와 젠체하는 ‘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그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경험한다 생각했지만, 그래서 나이는 이미 어른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나 어른이 되기엔 한참 먼, '어른이'로 남아있는 내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언제쯤 나는 어른이에서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졸렬과 젠체를 초월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오래 참으며 온유하고 포용력 있고 인격적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어른이 되는 날이 과연 오긴 할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이집트 왕자’ 모세는 항상 놀라운 일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갈랐고 두 손을 들어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렇게 많은 기적들을 목도하며 그들의 여정을 계속해 오던 중, 모세는 십계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시내산을 올랐다. 며칠이 지나도 모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해졌다. 결국 이집트를 떠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귀중품과 패물을 가지고 기어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차라리 모세를 택하여 다시 새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하나님께 그는 마음을 돌이키시기를 간청했다. 이처럼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보고 원망과 불평을 들으면서도 그는 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변호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순간의 치기와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고 그 일로 한순간에 그는 왕자에서 살인 수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기 전까지 도망자로 살았다. 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자기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입이 둔하여 할 말을 알지 못한다고 내빼기 바빴다. 부르심을 받기 전인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그도 어른이였다. 하루 아침에 믿음의 조상인 모세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그도 나와 같은 어른이였던 시절이 있었단 걸 생각하면 나에게도 아직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솔직하지 못했는지를 말하는 그 챕터에서 이주윤 작가는 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자신에게 있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이라 표현했다. 나에게도 극기훈련이 필요한가 보다. 어디까지 솔직하고 싶은 건지, 솔직할 수 있는건지. 여전히 나는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웬만한 것은 피하고 싶기만 하다. 진정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일은 아직 멀었는지도 모른다. 서툰 어른이로 얼마를 더 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어른이의 시간이 진정한 어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는 진짜 ‘으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Special Thanks to..

이 글을 쓸 수 있게 내 이마를 한 대 후려치는 말을 해준 나의 친구 H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너무 늦게 글을 내서 미안하단 말도 함께 전합니다.



_ '21 SPRING



작가의 이전글 City of Tod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