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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Feb 24. 2022

지금의 나

Heaven and the City Season 3 EP 06

남편이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글로 써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좋은 생각이다 싶으면서도 엄두가 안 났다. 지난 1월 초를 마지막으로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한, 내지는 않은, 나는 은근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브런치 어플은 끊임없이 나에게 글을 써야 할 타이밍이라고 알려주었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라이팅 메이트 친구 J도 글 좀 쓰고 있냐는 물음이 내게 건넨 첫마디였다. 한참 닫아 두었던 나의 랩탑에는 살짝 먼지가 앉아있었다. 뭐라도 써볼까 싶어서 컴퓨터를 켜본 날에는 ㄴ, 아니면 ㅇ을 연달아 누르기만 할 뿐.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슬아 작가가 하는 글방에서처럼 갑자기 글감을 턱 하고 받은 것이다.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아직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이전의 나’와는 정말 다르다는 것이다. 1년 새에 나를 설명하는 말에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이 끼어들었다. 그걸 어느 때보다 실감한 것은 이번 22학년도 새 학기를 맞아 이력서를 쓸 때였다. 주소를 서울에서 대전으로 바꿔 넣었다. 결혼 유무란에는 기혼 체크박스에 체크를 했다. 가족관계를 쓰는 란에는 부모님과 동생 이름을 적는 대신에 배우자 이름을 적어냈다. 자기소개서에서는 어떻게 교직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까지 전에 썼던 내용을 control+c & control+v 하면 됐었다. 이번에는 어찌하여 이 대전 땅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을 넣었다. 아이언맨 슈트의 mark 2 이상 버전이 된 것이다. 결혼 한번 한 것뿐인데. 이력서를 작성하며 바꿔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소라이지만 조금은 다른 이소라가 된 것이다.    


또 달라진 것은 신앙생활의 그라운드다. 6살 때부터 지난 2021년까지 나는 쭉 모교회에 몸담고 있었다. 짧은 외국 생활로 외국 교회 문화를 접해 보긴 했고 가끔 대형교회들에 한두 번 방문해본 적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모교회 외에 다른 교회 문화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 이런 내가 결혼으로 남편이 몸담고 있는 교회로 옮겨와 새롭게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이런 나의 사정을 알고 내가 미처 감당하기 어려울 일들을 염려하여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해주었으며 영적으로도 도와주려고 많이 노력해 주었다. 그의 도움과 배려는 참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 내 신앙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나의 스승도, 사람들도, 사역도 없었다. 내가 형성한 영적 유산이 이곳에는 하나도 없었다. 제로 베이스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새로 생긴 명칭이 내가 이전 같지 않음을 실감케 했다. 그동안 나는 교회에서 일개 평신도였고 평생을 ‘소라 자매 불렸다. 그게 아니면 나이 어린 동생들이 언니, 가르쳤던 학생들이 쌤이라고 나를 불렀던  다였다. 그것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인식하고 살았던 내게 다른 명칭이 붙었다. 선생님의 부인을, 사장님의 부인을 사모라 부르지 않는가. 목사의 부인인 나에게도 ‘사모 붙었다.  명칭은 나를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람의 성도로 인식하게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같았다. 양혜원 작가가 말하는 동류 그룹을 찾기 어려운 경계인으로 자리하게  것이다.   


남편의 이직과 이사로 분주하고 정신없던 일상들이 지나가고 얼추 정리가 되자 최근 시작한 구직 활동이 나에게 이렇듯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동시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변화들이 갑자기 엄청난 쓰나미처럼 다가와서 약간 정신이 멍해졌다. 어제는 이 글감에 대해 얘기하다가 남편에게 힘들다면서 어둠의 기운을 잔뜩 내뿜으며 티슈 몇 십장을 적실만큼 눈물을 쏟았다. 이에 남편은 그게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아 몸서리치게 괴로워했다. 자신의 일로 나에게 부담을 지우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눈물 바람을 내가 언제 겪어봤더라. 그 첫 시작은 동생이 태어나 함께 집으로 돌아온 여섯 살, 초여름이었다. 6년 동안 엄마는 나의 양육자이자 친구이며 모든 것이었는데 동생이 태어나자 나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늘 동생을 안고 있어서 엄마 곁에 갈 수 없었다. 오랜만의 산후통과 육아의 고단함으로 엄마는 지쳐 있었을 것이다. 여섯 살의 나는 그걸 미루어 짐작할 리 만무했고 아기로 인한 변화가 싫어서 며칠을 밥도 안 먹고 등 돌리고 앉아 울기만 했다. 처음 몇 번은 엄마 아빠가 달래주었지만 나중에 보니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고 울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이 눈물 바람의 시위는 하등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어느 날, 마침내 울음을 멈추었다.      


하나 더. 호주에서 공부할 때. 주를 더 배우겠다고 공부를 하러 갔는데 나의 매일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말씀을 배우면 뭐하나, 그대로 살지를 못하는, 아니 않는데. 그런 어리숙함과 미숙함의 결정체였던 외국에서의 연애 경험은 이 모든 것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모르면 좋겠다고, 다 모르겠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진짜 너무 마음이 답답해서 동네 해변가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미친년처럼 엉엉 울면서 걸었는데 교회 한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시고는 팔을 붙잡고 너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으셨다. 할머니가 걱정하실까 양손으로 눈물을 벅벅 닦으며 그냥 집에 가고 싶어 그런다며 얼버무렸다. 안쓰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기숙사로 올라가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시던 할머니를 보며 번뜩 정신이 나서는 이렇게 울고 있을 일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이번의 눈물 바람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한번쯤은 경험해보기를 원하며 누구보다 호기심을 불태우지만 유독 변화에 유연치 못한 사람이 지금의 나다. 나에게 익숙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길 절실히 원하고 바라며 그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길 소원한다. 늘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때마다 있던 불안과 변화를 어찌 저찌 대처해 온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던가. 때로는 포기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면서 많은 변화들을 난 경험하고 헤쳐왔다. 나에게 새로 붙은 말과 표현들이 나를 한정 지을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바뀌기 싫다고 떼쓰는 일은 이제 마흔을 앞둔 어른에겐 맞지 않는 못난 처사다. 이 단어들로 내게 주어진 지금의 나의 새로운 경계에서 분명 무언가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상은 똑같이 흘러간다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우린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리스천인 이상, 내 인생은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무한의 생명을 갖고 유한의 삶을 사는 인생이 어찌 휘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 사는 동안 나는 내내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그랜드 시프트라며 두려워하고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묵상 말씀처럼 그건 모두 나의 연약함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날에 이전에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라 말한다. 이전의 나의 역사에 개입하신 그분의 흔적을 의지하면 다시 변화의 물결에 맞설 수 있다. 그리하여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축복하라 하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고 끝내야겠지.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나는, 내가 가늠하지 못했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이다.

그분의 도우심과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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