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and the City Season 3 EP 09
남편과 나는 1년의 연애 기간을 보내고 결혼했다. 결혼 전 1년은 짧았지만 아주 많은 일들이 지나갔던 시간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고민스러웠던 건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시켜 결혼에 이르는 확실한 관계로 만드는 가였다. 그러나 나도, 남편도 그다지 사람이나 관계에 관심 없는 타입인 데다가 특히 나의 경우는 이런 진지한 관계가 오랜만인 동시에 결혼까지 생각해야 하는 수준의 첫 만남이라서 더욱 고민이 깊었다.
관계에 유달리 취약한 내가 과연 결혼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래서 관계에 관련된 책이나 영상들을 자주 찾아봤었다. 그러다 접한 한 영상은 관계에 출생 순서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관계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은 주로 김지윤 소장의 강연이었다. 그중 커플 케미 중 최악의 케미는 바로 장남—장녀 커플이라는 내용을 접하게 됐다. 뜨끔했다. 나는 장녀, 그도 장남. 으아.. 우리의 삐걱거림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구나. 최악 of 최악이라는데 이 사달을 어쩌면 좋나.
그녀가 정리해 준 장녀의 특징은 이러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완벽주의자의 성격을 보인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강요받으며 성장하지만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없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걱정이 항상 있다. '걱정이 많은 완벽주의자'가 장녀들을 설명하는 알맞은 표현이 된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보다는 조직적이고 지배적인 특성을 먼저 배우게 되고 이를 강하게 띄게 된다고 한다. 그동안 자기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에 워낙 익숙해져 있는 상태다 보니 충고를 잘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의견은 솔직하고 가감 없이 제시하는 특성이 있다. 쭉 듣고 보니 어머.. 이거 다 내 얘기잖아?
이런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된 것은 본격적인 결혼 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그 정점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날씨는 점점 더워졌고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나는 학교 생활에 더욱 지쳐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제때 사용하지 못한 식재료들이 요리 담당인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날은 이미 상해버린 애호박 하나를 버리고 남은 것들이라도 살려보려고 애호박전을 부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호기롭게 재료와 반죽을 준비했는데 좀처럼 내 호박전은 백종원 선생님의 그것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요리는 전적으로 칼을 잡은 나의 몫. 우리 둘의 저녁을 위해 나는 이것을 반드시 해내어야만 했다. 첫 판은 그래, 잘 안될 수 있지. 그러나 두 번, 세 번을 부쳐도 갈수록 알 수 없는 형태의 전이 내 팬에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뭔지. 슬라임도 아니고.. 이 더운 여름날, 이걸 하나 부쳐 먹겠다고 내가 뜨거운 불 앞에서 흐물거리는 전과 씨름을 하고 있다니... 갑자기 열받아서 에이씨! 하고는 다 주방 개수대에 던져 버렸다. 졸지에 남편은 한 장의 뜨거운 물컹한 전과 더불어 열받은 나를 마주하고 불편한 저녁 식사상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친 남편이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까지 나에게 주방 접근 금지명령을 내렸다. 자신은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좋은 거지 맛있는 요리를 먹어야 좋은 게 아니라고, 이렇게 모든 짜증과 열폭을 내면서까지 힘들게 밥해서 먹고 싶지 않다고 부드러우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또한 내가 그런 행동과 태도를 보일 때 남편은 그것을 받기가 어렵다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앞으로 식사는 모두 자신이 담당할 테니 얼씬도 말라는 접근 금지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남편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이 한심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내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주방 접근 금지명령 이후로 지금까지도 남편이 요리를 다 하고 있다. 방학했으니까 이제 나 괜찮다고 몇 번을 설득해봤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오늘도 남편은 점심시간에 집에 와서 직접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같이 나눠먹고 뒷정리까지 하고서 다시 사무실로 나갔다.
요리 금지를 당하고서 주방을 바라보며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장녀로서의 나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문제였다. 요리는 완벽하게 해내야 하고 나는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은 것. 남편이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도와주냐 물었는데 무시했던 것. 기껏 전 한 장을 제대로 부쳐내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워 이것밖에 안 되냐 나를 타박하며 느꼈던 자괴감과 실망감. 그리고 어떤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부리는 짜증과 성질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부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예수님의 친구들이었던 한 자매들이 있었다.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언니인 마르다가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를 준비해야겠기에 마르다는 다급해졌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게 아닌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상황에 한가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보며 마르다는 이해가 안 됐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동생한테 저 좀 도와주라고 해달라고 말을 했다. 이게 바로 장녀다. 다 앉아만 있으면 밥은 누가 하냐! 이게 장녀들이 가진 두뇌 회전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나는 마르다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나도 말씀 듣고 싶지... 근데 그러면 밥은 어떻게 먹냐고!! 그러나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이왕이면 더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신다. 그리고 더 좋은 편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밥? 못 먹어도 괜찮다. 말씀으로 영이 풍족해지기 때문이다. 밥보다 그분의 말씀이 당연히 더 중요하다. 더 좋은 편이 무엇인지는 내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결혼을 통해 나는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남편의 도움과 지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참고 넘어가 주었을, 가깝지 않은 관계의 사람들은 신경 안 쓰고 무시했을 나의 잘못된 모습들. 반드시 고쳐야 마땅하다. 지금까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남편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것을 일깨워 줄 수 있었을까. 남편에게 고맙고 이런 남편을 허락해주신 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또한 이런 부족한 나지만, 반대로 남편도 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아마 그도 있지 않을까? 우린 둘 다 첫째인 데다 성격 유형도 똑같으니까. 하핫.
우리는 이제 1년 하고 두 달을 부부로 함께 했다. 지난 400여 일은 고맙고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조합이 최악 of 최악이라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너무 성급한가?). 앞으로 함께할 시간들을 통해 달라질 나와 우리의 모습들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기쁘게 요리를 하는 남편을 도우며 부담 없이 식탁을 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