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투이, 『루』, (문학과지성사, 2019)

by 이은



‘그리고 그 고요한 순간에 찰칵하고 방아쇠가 당겨졌다.’*


『루』와, 『만』 주문한 지 하루 만에 왔다.
두 권의 책은 분홍과 하늘의 양장본이 한 쌍처럼 어여뻤다. 책을 이렇게도 예쁘게 만들 수 있구나. 생각했다. 베트남은 낯설지 않았지만, 베트남을 이야기하고 베트남을 쓴 베트남 태생의 작가는 낯설었다. 많이 낯설었다. 책 띠에 인쇄된 킴 투이의 사진은 베트남 여성들 특유의 화장법이 두드러져 보였고 ‘눈썹을 그리고 파란 아이섀도를 칠한 여자애들이 자본주의의 폭력에 당한 거라고’ 제복을 입은 병사들에게 붙잡혀 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킴 투이는 어떤 이야기로 25개국에 번역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길래? 기대했지만, 사실 책을 받아들고 펴지도 못한 채 근 1주일을 보내고 말았다. 이러저러한 핑계로.
급하게 읽어 놓친 부분이 많을 듯도 하지만, 시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편안하게 읽히는 소설이라 그래도 조금은 위안을 얻는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읽을 책으로 분류를 해둔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해보자면,
픽션과 논픽션을 섞은 킴 투이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수히 넘나들며 그것들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살아냈을 이야기들을 저렇게 담담하게 면면을 반짝이고 정화된 것들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눈앞에 쨍쨍히 그려져 아픈 것들도 꽃들로 피고, 서러운 것들도 꽃으로 피어 킴 투이의 꽃은 베트남의 영혼을 『루』로 피워낸 것 같다.
우리가 겪은 식민지, 우리가 겪은 전쟁, 그것들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무수한 살육과 사상과 밀고와 혁명 이같은 무서운 단어들. 예를 들자면, 삼촌의 장례식장에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와 말없이 혼자 몇 시간을 지켜보던 초라한 남자, 삼촌의 말들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삼촌은 '응우옌 안 띤‘에겐 여자와 정치, 그림과 책 온갖 경박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우상도 왕도 아니었던 것이다.

『루』는 우리의 할머니와 엄마가 흘린 눈물과 피에 바치는 자장가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나는 불꽃이 터지고 빛줄기가 화환처럼 펼쳐지고 로켓과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환한 하늘의 그림자에서 태어났다. 나의 탄생은 사라진 다른 생명들을 대신하는 임무를 지녔고, 나의 삶은 어머니의 삶을 이어갈 의무를 지녔다.
나의 엄마는 6·25 때 폭격을 피해 달아나다 몇 번 정신을 잃었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고 했다.
몇 해 전 만난 어르신은 월남 참전 용사였는데 부대원들 다 죽고 혼자 살아왔다며 날씨가 궂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임대아파트 앞 4차선 대로변에 드러누워 다 늙은 엄마를 부르며 ’엄마 나 혼자 살았어, 나 혼자 살았어‘ 온몸으로 도로를 뒹굴었고 여지없이 구급차에 실려 가곤 했다.

그녀는 그런 한 민족이, 그런 한 개인이 가진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 들여다보고 보듬고 달래고 기록한 것이다. ‘보세요, 전쟁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킴 투이는 그러한 것들이 ’30년밖에 안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흉터들로, 섬광으로 알아볼 뿐이‘라고 탄식한다..
누구의 책임일지는 모르겠다.

책을 읽다 한 후배가 생각났다. 후배는 심한 지체 장애가 있는데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밝고 씩씩하다. 결혼적령기에 들면서 후배를 걱정하던 부모는 베트남에서 며느리를 얻어왔다,
후배보다 10살이나 적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궁지에 몰린 쥐가 연상됐다. 후배는 아내에게 최선을 다했고 아들을 둘 낳았다. 아내도 최선을 다했다. 『루』를 후배의 그녀에게 보냈다. 『루』의 주인공 ’응우옌 안 띤‘과 같은 ’응우옌’이라는 성씨를 가진 그녀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궁금했다. 내가 느끼는 이 서사적인 아름다움을 그녀는 어떻게 느낄까? 킴 투이가 캐나다에 정착해, 캐나다 사람이 다 되었듯 후배의 아내도 한국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다 되었다는 건 어떤 뜻일까?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 이모 고모 삼촌 그녀의 피붙이들을 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아오자이의 관능적인 치맛자락을 이제는 특별한 날만 기억해내는, 구정이 되면 노란색 매화꽃이나 붉은 복숭아꽃이 아닌 떡국을 먼저 떠올린다는 것일까?
’자기는 베트남 사람이라고, 무조건 베트남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녀는 고향 정글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게 경찰에게 통역해달라고 애원했다 (...) 그녀의 나이는 살아온 햇수, 달수, 날수가 아니라 얻어맞는 동안 본 별들의 개수, 그것일 테니까‘

킴 투이가 생애 처음 쓴 소설이 이 책이라고 한다.
나도 생애 처음 소설 쓰기를 시도했고, 내 이야기를 적다가 내가 아닌 이야기를 적다가,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마구 흔들리는 내 소설의 퇴고 과정에서 『루』를 만났다. 킴 투이 그녀가 담담하고 차분하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한 번씩은 나도 내 슬픈 소설들에 차분하고 담담히 두 줄 긋고 잠들고 싶기도 하다.

그녀의 손에서 베트남의 아프게 들끓던 역사가 꿈처럼 차분하고 조용히 흘러간다



* 『루』,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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