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 아래

by 김주영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은 한 지붕 아래 여러 가구가 함께 모여 살던 곳이었다. 때는 1970년대였다. 시골을 떠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사람은 늘었지만 집은 모자랐다. 서울에 온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의 집에 다닥다닥 붙어살아야 했다.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은 그런 집 가운데 하나였다.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고, 몇 가지 파편적인 조각만 남아있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이 딸린 한 칸짜리 방들이 좌우로 줄지어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방 하나가 하나의 식구를 품었다. 대여섯 세대쯤 한 지붕 아래 살았던 것 같다.


마당은 일직선으로 길었다. 마당 한가운데가 수돗가였는데, 세입자의 식솔 모두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수도 펌프가 있었고, 빨간 고무 대야가 있었고, 빨래판과 비누통이 있었다. 엄마들은 수돗가에서 빨래도 하고 식재료도 다듬고 세수도 했다. 수돗가에서 물 긷는 소리가 들리면 왁자지껄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 나이는 대여섯 살이었는데, 한여름이면 수돗가에서 엄마가 나를 홀딱 벗겨 씻겼던 기억이 난다. 아직 창피함을 모르던 나이였다. 수돗가에 엄마들이 모이면 수다로 떠들썩했겠지. 그 수다로 하루의 고단함을 잊었으리라.


방의 내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옆에 딸린 부엌은 선명하다. 바닥과 벽이 짙은 회색의 시멘트였다. 방으로 통하는 문가에 연탄으로 불을 때는 부뚜막이 있었다. 부엌은 몸을 씻는 곳이기도 했다. 겨울에 부엌에서 찬물로 몸을 씻다가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 모래알이 모였다 흩어졌다 끝없이 반복되는 꿈을 꾸었다.

무엇보다 부엌은 내 놀이터이기도 했다. 혼자서 불장난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엄마가 없을 때 나는 부엌에서 혼자 전쟁놀이하며 성냥갑과 장난감을 태운 적이 있다. 빨간 불길에 휩싸인 장난감을 보면서 죄책감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기억에 각인된 건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집 대문 옆에 있었다. 그 시절 대부분 화장실이 그렇듯 재래식이었다. 화장실에는 두 다리를 짚을 수 있는 나무 발판이 있었고, 그 발판을 두 발로 딛고 앉아 볼일을 보는 구조였다. 어린 내 눈에 발판 아래는 굉장히 깊었다. 발을 헛디뎌 화장실 아래로 빠지지 않을까 늘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도 공용이었기에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줄 서는 풍경은 흔했다. 한 번은 내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데, 등 뒤에서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뒤돌아서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기척으로 보아하니, 그 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거동은 얼어붙은 나와 달리 태연했다.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그 상황이 어서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집에 같이 살던 또래 아이들과 동네 공터에서 놀았던 순간들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땅따먹기, 오징어게임, 다방구, 손야구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로 하루를 채웠다. 그 당시 놀이는 아이들의 모든 것이었다.



지금 그 집은, 그 동네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아파트 단지로 변했겠지? 집은 시대를 반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 살았던 서울의 한 변두리 동네. 가난도 몰랐고, 돈도 몰랐던, 그저 함께 어울리는 게 즐거웠던 장소로 그 집의 기억이 남아있다. 서로 뭉쳐 다니며, 뜀박질하며, 장난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놀이에 이기려고 애쓰기도 하면서 감정의 굴곡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처럼 지금도 한 지붕 아래 여럿이 함께 산다. 이제는 여러 세대가 아니라, 다른 종(種)이 함께 살고 있다. 고양이 열두 마리, 개 두 마리와 함께 지내며 그때처럼 북적이는 하루를 보낸다. 그 소란스러움이 내 삶에 안식이 되고 있다. (*)


/이미지는 AI의 도움으로 구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