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집

by 김주영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집은 서울 성북구 장위 3동, 한 주택단지였다. 동네는 중랑천의 지류를 따라 단층 주택들이 빼곡했고, 집들 사이로 넓거나 좁은 골목길이 바둑판처럼 이어져 있었다. 집들은 대개 비슷한 모양과 구조였다. 빨간 벽돌집이 많았고, 집 대문을 열고 서너 걸음 정도 걸으면, 바로 현관문에 닿는 마당 좁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가 살던 집은 셋집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대학 가기 전까지, 독립하기 전의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였다. 10년 넘게 한 집에서 월세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집주인이 어머니 고향 친구였기 때문이다.


집의 구조는 특이했다. 주인집 대문과는 반대쪽에 별도의 문이 있었고,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면 곧바로 부엌이 나왔고, 부엌을 지나 방 두 개가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 방들은 부엌보다 어른 무릎높이로 한 단 높았다.


부엌 바닥은 타일이 아니라 시멘트로 마감되었다. 한쪽에 연탄아궁이로 된 부뚜막이 있었고, 그 부뚜막에 커다란 양은솥이 놓여 있었다. 양은솥은 어린 내가 두 팔을 한껏 벌려야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부뚜막 맞은편에 어른 앉은키 높이의 수도꼭지가 있었다. 부엌은 욕실도 겸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세수와 샤워, 양치질도 했다. 추운 날에는 부뚜막의 양은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었다.


그 집에 살면서 우리 식구는 크고 작은 사고를 겪었다. 돌이켜보면 사고의 많은 부분이 개인의 부주의였다기보다 집의 환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안전한 주거 공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대였다. 하긴 지금도 안전보다 이윤이 더 중요하긴 하다.


연탄으로 겨울 난방을 하던 때였다. 보일러는 구경하기 힘들었고, 기름이나 가스가 난방으로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내가 살던 집도 연탄을 때어 방바닥을 데웠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동생 둘이(당시 여섯 살, 세 살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했다. 흔들어 깨워도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바람 빠진 공기 인형처럼 몸이 축 늘어지기만 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엄마가 놀라 동생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땅바닥에 눕히고 찬 바람에 쏘였다. 동생들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엄마가 어디선가 동치미 국물을 구해와 동생들에게 먹였다. 동네 아줌마 몇몇이 무슨 일이냐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자 두 동생은 시차를 두고 깨어났다. 그 시절 비일비재했던 사고 중 하나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가난의 풍경’이었다.


동생들이 차례로 화상을 입는 사고도 있었다. 부뚜막에 놓인, 내 몸만 했던 양은솥이 원인이었다. 날이 추우면 우리 식구는 양은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었다. 하루는 둘째 동생이 양은솥에 담긴 뜨거운 물을 대야에 부으려고 들다가 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솥을 놓치고 말았다. 뜨거운 물이 동생의 한쪽 종아리에 쏟아졌다. 동생은 화상을 입었고,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동생의 종아리에 감겨있던 거즈와 맑은 젤리 같던 화상 연고가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생의 종아리에는 화상 자국이 아직도 흉터로 남아있다. 둘째 동생이 다리에 화상을 입고 몇 달 뒤, 이번에는 막내가 똑같은 경위로 같은 부위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동생들보다 조심성이 많았을까? 나는 별 탈이 없었다. 그 집에서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양은솥을 들었을 때 그 묵직함을 나는 기억한다.


물난리를 겪은 적도 있다. 어느 여름 동틀 무렵이었다. 자고 있는데 엄마가 급하게 나와 동생들을 깨웠다. 잠이 덜 깬 채 방문을 열었는데, 부엌이 흙탕물로 차 있었다. 방 안까지 물이 들이칠 참이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중랑천이 범람해 동네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담장도 없이 길가에 바로 맞닿아 있던 우리 집으로 물이 들이닥친 거였다. 얼른 일어나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동네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하천이 범람해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시로 놓인 출렁다리로 하천을 건너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함께 출렁다리를 건너던 동네 아이 몇몇은 재밌어하는 듯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이 순간을, 역경을 헤치고 학교로 향하는 고난의 서사로 만들고 있었다. 당시 학교에 하루라도 안 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전쟁이 나도 학교는 가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우리에게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그 집은 내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낸 집이었다. 가난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집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고3 때 굳이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다. 결국 대학생이 되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나의 다음 집은 대학 기숙사였다. (*)


/이미지는 AI의 도움을 받아 구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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