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읽은 철학 책

by 김주영

내가 처음 읽은 철학 책은 <철학에세이>다. 지은이는 조성오. 동녘출판사에서 1983년에 발간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으나, 읽은 시기는 또렷이 기억난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직후였다. 입시가 끝나자,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는 제 일을 다했다는 듯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시간이 남아돌았다. 남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를 때, 이 책 저 책 집어 들었는데, 그때 우연히 읽었던 책이 바로 <철학에세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은 당시 대학 운동권의 필독서로 정평이 나 있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고등학생 시절, 이 책은 나에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처음으로 철학이 단지 따분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다. 학교에서도 철학을 가르치긴 했으나 시험을 위해 암기할 과목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철학은 내 삶과 관련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철학에 대해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입시를 위한 공부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허락되지 않은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은 사치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이 책이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은 세계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철학이 내 사유의 문을 두드린 순간이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삶이 바뀌는 것처럼, 이 책과의 인연이 내 삶을 흔들었다.


이 책은 수많은 철학 사조 가운데 변증법을 설명한 책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내적 모순이 변화를 만든다.’와 같은 변증법의 핵심 명제들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생각조차 못 해봤던 사고였다. 지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변증법을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20여 년에 걸쳐 개정에 개정을 거듭해 수십 쇄를 찍으며,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 책에 대한 근황이 궁금해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봤다. 다음과 같은 댓글이 눈에 띄었다. ‘80년대 대학가에 돌풍을 일으켰다는, 오늘날 동녘 출판사가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 그랬다. 이 책은 80년대 대학가의 의식화 교재였다. 그리고 시간이 더 오래 흐른 뒤에는 고등학생들의 논술 참고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운동권 교재에서 입시용 교재로, 그 변화의 격차가 새삼 커 보였다. 책의 운명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내게서 이 책의 의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철학 에세이>의 저자인 조성오는 1977년에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야학 활동을 하며 철학과 경제사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원고가 이 책이 되었다.


<철학에세이>는 변증법에 대한 사고뿐만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도 선물로 주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소설도 그때 읽게 되었다. 이렇게 <철학에세이>로 시작한 독서는 또 다른 독서를 낳았다. 본격적인 독서의 시작이었다.


나는 여전히 철학 책을 갈망한다. 진리에 대한 궁구는 늘 철학으로 귀결되곤 했다. <철학에세이>는 그래서 나에게 고마운 책으로 남아 있다. 철학이 외워야 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자체임을 나에게 일깨워준 책이 바로 <철학에세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열렸던 질문이 나의 삶을 이끈 힘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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